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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의 문화재③ – 조양루(朝陽樓)] 이궁(離宮)의 문루 조양루(朝陽樓)

1938년 우두산으로 옮겨진 후 2013년 현 위치로 복원
1646년 부사 엄황이 세워…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호

우두산 이전 당시의 조양루.
우두산 이전 당시의 조양루.
 
 1876년 일본의 강압에 의한 굴욕적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은 서구열강의 개화 압력에 시달린다. 1882년 조미통상협정, 1883년 조영수호통상협정, 조독수호통상협정, 1884년 조러수호통상협정, 1886년 조불수호통상협정 등을 통해 더 이상 쇄국이 어렵다고 인식한 고종은 188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연호를 광무로 정해 독립국가를 선언한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임금들은 유사시 왕이 피난해 나라를 유지할 방비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인조 당시부터 전국의 요새를 찾아 이궁(離宮) 논의를 해오던 차였다. 차일피일 미루어지던 이궁에 대한 논의는 고종 때 결실을 맺게 된다. 188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조선의 내정은 일본에 장악됐고, 러시아를 필두로 한 서구열강의 갈등은 국가의 안위에 중대한 위협이 됐다.

 국호를 고친 고종은 유사시를 대비해 비밀리에 이궁을 건립한다. 이궁의 대상지는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방어에 용이한 분지인 춘천이었다. 지금의 강원도청 자리다. 이궁의 문루는 1646년 부사 엄황이 세운 조양루를 사용했다. 조양루는 건설 당시부터 관아의 문루로 사용되던 건축물로, 말을 타고 들어가는데도 문제가 없을 만큼 높아 이궁의 출입문으로 손색이 없었다. 봉황의 위엄을 지키는 위봉문과 함께 건설된 조양루는 마침내 부사 엄황이 꿈꾼 태평성대의 상징처럼 왕실의 출입문으로 격상됐다.

 1887년 건설을 시작한 춘천이궁은 유수 민두호에 의해 1890년 1차로 완공된다. 그러나 고종은 한 번도 춘천이궁을 방문하지 못했다, 대한제국의 원대한 꿈은 일본의 강력한 군대 앞에 무기력했고, 대한제국의 정치권력이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궁과 춘천관아가 함께 있던 현재의 도청자리는 1896년 강원관찰부로 승격되고 한일 강제병합 이후 강원도청으로 바뀌게 된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호인 조양루는 함께 자리를 지켰던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호인 위봉문과 함께 수많은 역사기록을 지닌 춘천의 대표 문화재다.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춘천은 일제잔재 청산을 이루지 못한 드문 지역이다. 도처에 남아 있는 일제의 잔재, 그 중에서 광복 이후까지 보존되고 있는 신사는 춘천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조양루도 일제 잔재 미청산이라는 상처를 겪었다. 이궁의 출입문이며, 강원도 관찰부의 상징이고, 춘천의 대표 문화재인 조양루는 일제에 의해 1938년 7월 21일 우두산으로 옮겨졌다. 더욱 부끄러운 건 후대 우리 기관들의 태도다. 우두산에 조양루가 있던 2011년까지도 조양루의 안내문에는 조양루가 1908년에 우두산으로 옮겨졌다고 쓰여 있었던 것이다. 지역의 역사단체가 이 문제를 지적하며 조양루가 옮겨진 시기를 1938년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조양루를 다시 제자리로 옮기기 위한 해체과정에서 정확한 이전 일자가 밝혀졌다. 우두산으로 이전할 당시 쓴 상량판이 지붕에서 발견된 것이다. 목판으로 된 상량판에는 조양루가 1938년 7월 21일 옮겨졌음이 분명히 기록돼 있다. 이궁의 문루였던 조양루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우두산으로 옮겨졌음이 밝혀진 것이다. 춘천의 대표적 문화유산 조양루는 2013년 봄, 이궁의 문루로서 그 역할을 감당했던 현재의 자리로 돌아왔다.

오동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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