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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번째 마실 – 사북면 고성리]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는 사람들

용화산
 
 고성리(古城里)는 고탄리(古呑里)와 더불어 맥국(麥國) 시절에 쌓았다는 용화산성(龍華山城)을 따서 만든 지명인라 용화산을 빼놓고는 말할 수가 없다. 식물을 관찰하러 철마다 한 번씩은 꼭 가는 곳이 용화산휴양림 산책로다. 길가의 야생화들을 보며 물소리 즐거운 용화산휴양림 초입은 봄여름가을겨울 할 것 없이 철마다 걷기가 좋다.
 
 여름산은 뜨거운 태양을 피할 계곡이 있어야 제격이다. 숲 사이로 들리는 제법 무게감 있는 물소리가 계곡으로 이끌고, 너럭바위 위에 신발을 벗고 탁족을 즐기며 마시는 커피 한 잔이 더없이 행복하다. 그저 흘러가는 물에 시선을 주고 불어오는 미풍에 호흡을 맞추었다. 그것들에게 나는 아무 것도 해 준 것이 없이 누리고만 있어 미안함과 고마움에 숙연해지기도 했다.
 
 단단한 말 근육 같은 화강암의 암벽과 낙락장송 사이로 흐르는 안개 속에서 아직 다 지나지 않은 빗방울을 맞으며 하산하던 여름 용화산. 처음 오르던 날 거장의 수묵화 같은 풍경은 20년 세월에도 흐려지지 않는다.
용화산은 사여교를 건너 휴양림에서 갈 수도 있지만 코스가 길다. 대개는 사여교를 지나쳐 직진해 큰거리를 거쳐가는 등산로를 선택한다. 욕심을 좀 내자면 큰거리에서 용화산 정상을 찍고 사여령을 지나 배후령 오봉산으로 내려올 수도 있다. 큰거리를 넘어가면 화천 삼화리로 가는 포장길이다. 화천 삼화리를 들머리로 잡으면 최단거리로 정상까지 갈 수 있다.
 
 위도 38°선상에 있는 고성리는 치열한 전쟁터였다. 용화산은 베트남전쟁에 출정하기 위한 국군의 파병훈령장으로 바위산은 유격훈련장으로 사용되었다. ‘군 폭발물 처리장’이라는 이름으로 산을 깎아냈다. 용화산뿐 아니라 고성1리에 있는 석봉산도 한국전쟁의 격전지였다.

시원한 물줄기를 쏟아내는 용화산폭포.
 
 “그때 나는 열 살인가 그랬어. 우리 밭이 석봉산 아래 있었는데 바로 이 맘 때야. 보리가 누렇게 익어 가는데, 새벽에 보리밭 사이로 공산당들이 총을 들고 밀려오는 걸 건너 산에 숨어서 처음 봤지. 그땐 너무 어려서 무섭다기보다 신기하더라고….”
 
 고성1리로 들어가는 성탄교 옆에서 논일을 보고 있던 할아버지는 고성1리 노인회장으로 이 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왔다.
 
 “그 이후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피란이라고 가긴 갔는데 멀리도 못 갔어. 전쟁이 끝나고 붙여먹을 땅이 여기 있으니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거지.”

모내기 한 논을 살피는 고성1리 노인회장.
 
 고성1리는 양지바른 들녘이 넓어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살던 토박이가 많고, 귀농 가구도 제법 된다. 인력이 부족해서 시내에서 고정적으로 농사일을 하러 오는 사람도 있다. 별빛산골유학센터 대표인 윤요왕 씨는 마을 일과 센터 일이 많아 인부를 고용해 농사를 짓고 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나 일하는 할머니들에게 새참 주러 가는 인삼밭에 따라 갔다. 파랗게 올라온 인삼 꽃대를 꺾고 있었다.
 
 꽃망울이 터지기 전의 꽃대궁들을 말려 차로 먹으면 좋다고 몇 줌 주기에 받아 들고 마을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마을회관 문이 활짝 열려 있고 할머니들이 모여 수박을 들고 있었다.
 
 “나는 송암에서 가마를 타고 시집을 왔는데, 마을로 들어오는 다리(성탄교)가 그때는 돌다리였어. 가마가 개울을 못 건너 내렸는데 치마가 질질 끌려서 어쩌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옆에 있던 형님이 새신랑을 확 밀어서 나를 업어서 건네줬어.”
 
 김인순(81) 할머니의 아직도 수줍은 얘기에 할머니들은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일제 때 송화초등학교를 다녔다는 윤용숙(85) 할머니는 해방이 되던 날과 전쟁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고성1리 마을회관 어르신들.
 
 “그날은 비행기가 막 날아다니고 좀 지나니까 해방이 되었다고 해. 사람들이 좋아서 길거리로 다 뛰쳐나와 소나무를 잘라다 큰길에 둥글게 문처럼 세우고는 거기에 태극기를 잔뜩 꽂아 놓고 만세를 마구 불렀지. 전쟁통엔 거기가 아마 남춘천쯤이었을 거야. 내 바로 앞에서 국군과 인민군이 딱 마주친 거야. 서로 총질을 마구 해대니까 군인들도 픽픽 쓰러지고, 내 앞에 있던 애가 총을 맞아 언덕으로 굴러 떨어졌어. 온통 피투성이였지. 우린 험한 꼴 많이 봤지.”
 
 어려서부터 물 길어다 밥해 먹고, 목화농사를 지어 길쌈을 해 베를 짜던 얘기며, 솜이불 호청 꿰매듯 아기 포대기를 만들어 끈으로 동여매 업고 밭에서 일하던 얘기, 남편이 어린자식 한 번 안아줬다가 시어머니한테 혼쭐나던 모습을 목격했다면서 바로 옆에 있던 할머니를 보며 이웃 할머니가 입을 뗐다. 귀가 잘 안 들리는 최고령 할머니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들어주기만 해도 할머니들 얼굴은 환했다.
 
 회관을 나올 때 그 세월을 어찌 견뎠을까 싶어 세상 좋아졌다는 시절을 사는 내가 부끄러워지는 순간, 할머니들은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고성1리 도정골 골짜기 산을 넘어 송암리로 가는 옛길은 사라졌다.
407번 국도로 돌아 나왔다. 고성리에는 조선후기에 대단위 백자도요지가 있었다고 한다. 민간에서 쓰던 생활자기가 대부분이었는데, 백토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고 한다.

고성2리 입구에 있는 선돌과 소나무.
 
 고성2리를 알려주는 표지판 뒤로 신라시대부터 있었다는 선돌과 아들나무라 불리는 멋진 소나무가 국도변에 있다. 엄마나무는 도로건설로 베어졌는데, 그 가지가 길의 터널을 이룰 정도의 거목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 선돌과 소나무에 제를 지낸다. 이곳을 안내해 준 이는 최대영씨로 고성리 전 사무장이다. 마을사람들이 나무를 자르다가 두 사람이나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를 따라 마을에서 운영하는 체험장이 있는 양통마을로 향했다. 소로 옆으로는 작은 개울이 흘렀다. 예전에는 개울 건너 쪽에 좁은 산길이 있었는데 매산골 넘어 샘밭으로 장을 보러 다녔다고 한다. 매산골에서 사는 할아버지는 화전민이었다.
 
 “나무 한 짐을 지게에 지고 저 산고개를 넘어 샘밭장엘 갔지. 그거 팔아 막걸리 몇 잔 마시고 고등어 두 손 사면 그만이야.”
 
 최대영 씨는 쓰레기를 싣고 유모차를 밀며 할아버지 집 앞으로 오는 할머니의 쓰레기를 버려주고 마을회관까지 태워다주었다. 그의 별명은 ‘괜찮아’다. ‘괜찮아’ 씨는 길에서 만난 또 다른 할머니의 일도 거들어 주었다. 마을의 아들 노릇을 하고 있는 그였다.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407번 국도에서 휴양림으로 가는 초입의 소나무 앞에서 멈추었다. 옆으로는 버스정류장이 있다.
 
 “여기가 딱 38선이에요. 휴전선이 생기기 전 소나무를 중심으로 길에 선을 긋고 소련군과 미군이 대치하고 있었어요. 이곳을 알리고 싶어 우선 바람개비만 세웠는데, 좀 더 자연친화적이고 의미 있는 방법이 있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용화산휴양림으로 가는 길가에 핀 야생화.
 
 이 말을 듣고 며칠 동안 38선에 대한 옛 사진들을 찾아보았다. 그 중에서 열 살이 채 안 돼 보이는 아이들이 한복을 입고 38선이라는 나무 팻말 앞에 서있는 사진은 꼭 매산골 할아버지를 연상케 했다. 어머니가 밤새 바느질을 해서 일 년에 한복 한 벌 얻어 입었다는 얘기도, 할아버지 어릴 때는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를 물었다가 얼굴이 화끈거렸던 순간도 떠올랐다.
 
 “놀이가 어디 있어요. 점심이라도 얻어먹으려면 부잣집 애기를 봐주든지 나무하고 소꼴 베러 다녀야지. 전쟁 때 다 불에 타서 산엔 나무도 없었어. 곡식이 없어 감자나 옥수수로 여름을 났지.”
 
 당시 사진을 검색해 찾아보며 철없는 질문이었다 싶어 송구했고, 지금의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게 된 것에 감사했다.
 
 며칠 뒤 다시 찾은 매산골. 매산골다리를 건너 장을 보러 가던 길의 흔적을 찾아 걸어보았다. 잘 지은 전원주택들 안팎으로 샤스타데이지가 줄지어 있고, 아기자기한 조형물과 벤치를 대문 앞길에 내놓기도 했다. 산오디 몇 알 따 먹으며 개회나무 꽃향기가 진동하는 길을 지나 숲으로 들어서니 짚신나물 노란 꽃망울 그늘에서 외롭다.

김예진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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