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이 남북으로 나눠지는 줄 알았는데, 어? 북쪽 선거구가 아주 넓어졌다. 아침에 화천에 사는 선배에게 문자를 보냈다. “살다보니 형과 내가 같은 지역구가 되었네요?” 일단 재미있다. 춘천 동면에 사는 내가 화천과 철원의 선후배들과 정치적으로 정확히는 동일 선거구로 묶였다. 이번 선거구 획정에 분개하는 춘천시민사회단체의 공동성명에 공감한다. 이게 뭔가? 춘천·철원·화천·양구(갑) 선거구는 이름과는 달리 춘천시 유권자만 투표에 참여하게 된다. 한참을 들여다봐야 겨우 알 수 있었다. 춘천·철원·화천·양구(을) 선거구는 춘천시 유권자와
그 날이 언제 오나 싶었는데, 마침내 두 달 남았다. 춘천시민들은 보편적 상식을 지닌 후보에게 한 표 던질 준비가 끝났다. 정책을 꼼꼼히 살펴볼 것은 당연지사. 각자의 기준이 10가지쯤은 되실 터. 충분히 점검하신 후에, 11번째 기준도 잊지 마시기를. “어디 보자, 우리 춘천의 지역먹거리선순환 정책에 대해 무슨 생각들을 밝혔을까? 오, 홍길동 후보는 나름대로 식견이 있는 것 같군. 쯧쯧, 임꺽정 후보는 정말 아무 개념이 없는데?”무슨 식견이 필요하고 어떤 개념을 알아야 할까? 사실 별것 아니다. 그냥 상식에서 출발한 것일 뿐이고,
통계에 의하면, 2018년 한해 34만 가구, 50만 명이 귀농귀촌을 했고, 강원도로만 좁혀도 4만 명 수준이란다. 이런 규모라면 귀농귀촌은 명백한 대세다. 도시대탈출이라는 사회현상이 연일 보도돼야 맞다. 그런데 농촌인구는 어째서 늘지 않을까? 어째서 지방소멸의 위기만 연일 보도되는 것일까?세상의 진실은 이러하다. 강원도 농촌마을에 실제로 자리 잡는 사람들은 해마다 4만 명이 아니라 4천 명 남짓으로 짐작된다. 후평1동 주택에서 장학리 아파트로 이사하면, 만천천 다리 하나 건넜을 뿐이지만 귀촌이다. 주소가 읍면인 경기도 신도시에 자
지난 칼럼에 이어, 농업농촌문제는 국지적이거나 농민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역설하고자 한다. 시민들이 함께 지켜주고 함께 개혁해야 하는 까닭은, 대한민국 전체가 직면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잠시만요. 궁금한 게 있어요. 왜 새삼스럽게 개발도상국 포기 선언을 한 거죠? 포기선언에 농민들은 왜 반발하죠?여러 경제지표를 봐도 이미 선진국 기준을 넘어선 것은 맞죠. 자유무역만 추구하면 개발도상국의 취약한 산업부문이 무너질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개발도상국과 저개발국가를 보호하는 장치들이 있어요. 우리는 농업부문에 한해서 보호 장치가 있었는데,
지난달 25일 주요 뉴스가 모처럼 농업을 다뤘다. 정부가 WTO 개발도상국지위 포기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수입농산물 관세가 낮아질 것이고 농업보조금이 삭감될 것이다. 시간문제일 뿐 이번 변화가 농업농촌에 타격을 입힐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농민공동행동 성명서의 절절한 목소리를 귀담아들어 보자. “계속되는 수입개방정책으로 국내농산물 값은 연쇄폭락을 맞았고 농가소득 대비 농업소득 비율과 국가 예산 대비 농업예산은 역대 정권 중 최저치. 한국농업은 적폐농업정책으로 무너진 지 오래다. 국익은 통상주권을 지켜내는 것부터 시작되며 농업을 살리
부조(扶助)라는 단어의 깊이를 생각하면 장례식장에서만 쓰기에는 아쉽다. 상부상조가 고루한 단어로 들리지만 사실 협동보다 더 친숙하고 의미는 훨씬 분명하다. 차마 어쩌지 못하며 안타까워하는 정감에서 출발해 쓰러지고 주저앉지 않도록 서로 부축하고 돕는 일이기 때문이다.사회적 부조라 할 수 있는 농민수당이 가시화되고 있다. 모든 농민에게 일정한 액수를 지급하는 정책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와는 접근 방식이 다르고 지향하는 진보도 다르다. 농민수당의 쟁점과 의미를 간략하게 들여다보자. 대개의 농업보조금·직불금은 농사의 종류와 규모에 따라 다양
의심은 사회진보의 출발이다. 신을 의심하며 계몽의 시대가 열렸으니, 신의 시대라서 구닥다리가 아니라 의심이 신을 구닥다리로 만들었다. 의심이 과학적 합리성으로 강화되자 세상은 눈부시게 명료해졌다. 모든 변화의 출발은 의심하는 개인이었다. 역사의 변곡점마다 원리는 같았다. 공동체적으로 의심한다? 의심하는 국가? 그런 건 없다. 의심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이다. 그러므로 불완전하기도 하다.역으로 의심을 해보자. 의심하는 개인은 좋은데, 과연 그 의심이 온전히 개인의 것일 수가 있는가? 당신의 의심은 입력된 바 없이
도대체 어쩜 그리 꽉 막혔을까? 언제나 자기 생각만 고집할 뿐이야! 이게 안 보이나? 남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아! 상식이라고는 없는 거야? 이제 상종하기도 싫어!누가 떠오르든 어떤 그룹이 연상되든, 이런 부류는 늘 우리 가까이에 있다. 집안에 있으면 일상이 지옥일 테고, 같이 일을 해야만 한다면 심히 고통스럽다. 사실 행복한 삶의 조건은 다른 무엇이 충족되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이런 사람들이 내 삶을 침해하지 않는 간결함이 행복의 조건은 아닐까. 물론 사회적 행복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소란스러운 곳에서도, 누가 내
6월부터 강원도 자치농정 구현을 위한 거버넌스 조직에 참여하고 있다. 중앙농정은 언제나 구조와 숫자에 얽매여 건조하다. 지방농정은 삶의 질에 주목하며 사람을 중심에 두는 촉촉한 농정일 때 옳다. 오랜 세월 지방농정은 중앙농정의 수행자였을 뿐 자치농정은 아니었다. 자치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최근 들어 지역단위 푸드플랜이나 농업회의소 등 자치의 공간이 거버넌스 형태로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간이 열렸다고 곧바로 자치 거버넌스가 원활하게 작동될 리 없다. 이 어려움은 농정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民)은 선거권
농민은 어떻게 놀까? 농촌에는 같이 놀 사람이 드물어진지 오래. 어울려 노는 것도 여의치 않다. 겨울날의 농민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요즘은 농한기도 따로 없고 갈수록 짧아진다. 사계절 노심초사 마음 바쁜 사람이 농민이다.사실 농민은 수준 있게 논다. 농사일과 마찬가지로, 철 따라 하늘의 기운을 따라 논다. 새벽 서리를 기준으로 놀고, 비와 바람과 기온을 기준으로 논다. 그런 농민의 놀이가 민속놀이고 세시풍속이다. 농민은 곧 민중이었고 백성은 모두 농민이었다. 물론 옛날이야기다.이제 농촌에는 척사(擲柶)대회 정도가 겨우 남았
춘천농살림학교는 지난 4월 16일부터 6월 18일까지 효자동에 위치한 사회적협동조합희망리본에서 농촌생활을 꿈꾸는 시민을 대상으로 ‘농촌활동가 아카데미’를 열고 있다. 《춘천사람들》은 농촌에 관심이 있지만 참여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위해 강의 내용을 요약해 소개한다.-편집자 주 ‘농(農)’의 정체는 무엇일까?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작물을 가꾸고 거기에서 농산물을 얻는 것을 의미할까?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천문과 인문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천문은 자연의 무늬로써 인간이 모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시간을 저만치 되돌려보자. 1995년 춘천에는 유기농업에 뜻을 둔 젊은 농민 몇몇과 이에 호응한 시내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온갖 불편을 기꺼이 감수하면서도 삶을 나누고 농산물을 나누었다. 스스로를 방주공동체로 불렀는데, 시장만능주의라는 대양에 떠있는 작고 단단한 배 한 척을 상상했나 보다. 이 공동체는 21세기로 바뀔 무렵 생협으로 진화했다. 현재의 춘천두레생협이 간직한 협동의 역사다.조금 가깝게 되돌려보자. 2007년 무렵 ‘로컬푸드’라는 개념이 춘천에 유입되었다. 식량주권이 위협당하는 글로벌한 시대에 지역먹거리 순환체계는 세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다. 개인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헛헛해서 그럴 것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명산을 오르고 유럽여행을 다녀도, 해소되기는커녕 더 증폭되는 정신적인 헛헛함이 있다. 그 이유를 묻고 배우려는 노력에 인문학은 통찰을 건네준다. 인문은 천문과 비교해 보면 좋다. 모름지기 천지자연이 그린 무늬인 천문이야말로 최상의 경지다. 천문은 언제나 자연스럽고 우리를 편안하게 만든다. 따라서 인문이란 천문의 경지를 흉내 내려는 시도다. 진정성 가득하고 너무도 적절해서 궁극의 아름다움마저 느낄 수 있는 경지, 즉 진선미(眞善美)를 가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