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운 최제우가 1860년 경주 용담에서 동학을 창도한 이래 10년이 지난 1871년부터 동학의 중심 무대는 강원도였다. 그 10년의 세월 동안 두 차례 큰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1864년 3월 10일 최제우의 순교였고, 다른 하나는 ‘이필제의 난’으로 불리는 1871년 3월 10일의 ‘영해교조신원운동’이었다. 최제우의 순교 이후 동학의 도통은 최시형에게 전수됐다. 도통을 이어받은 최시형은 경상도를 중심으로 은밀히 포교 활동을 벌였다.최시형은 1870년 이필제라는 인물을 소개받았는데, 그는 수차례에 걸쳐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3·1혁명 당시 강원도에서는 3월 3일부터 4월 21일까지 한 달 넘게 많게는 수천 명에서 적게는 수십 명까지 크고 작은 만세시위가 있었다. 시작은 철원이었다. 3월 10일부터 12일까지 3일 동안 철원과 김화에서 500~800여 명이 시위를 벌였고, 3월 28일 화천과 인제에서 각각 2천여 명과 1천여 명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4월 들어 홍천에서는 1일에 읍내에서 천도교인 중심으로 200여 명이 시위를 벌인 데 이어 2일에는 800여 명이 동면사무소를 습격했다. 3일에도 4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횡성에서도 4월 1일 1천여
현 춘천초등학교의 전신은 1906년 9월 1일 ‘보통학교령’ 발포에 따라 9월 15일 수업을 개시한 춘천공립보통학교였고, 춘천공보의 전신은 대한제국 1년 전인 1896년 9월 17일 당시 춘천군 부내면 아동리(옛 옥천동)에서 강원관찰부공립소학교로 개교한 춘천소학교였다. 춘천소학교는 사가에서 시작해 1906년 9월 강원도청 내 1청사를 임시 교사로 삼았다가 1908년 10월에 현 춘천시청 자리에 교사를 신축하고 이전했다. 학교 위치에 대해 《춘천교백년사》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돼 있다.“춘천읍 번화가 본정1정목(중앙로1가) 청력상점淸力
최근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문제, 일본군 ‘위안부’ 명예훼손에 ‘학문적 자율성’이라는 대법원의 판결, 이승만 기념관 건립 등 역사 왜곡이 수없이 행해지고 있다. 과거의 진실을 왜곡하면, 왜곡된 진실은 미래를 왜곡한다. 그 미래를 살아갈 청년들은 이 역사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와 《친일과 망각》을 읽고 이야기를 나눈 한국 근현대사 역사동아리 ‘날갯짓’을 만났다. 한국 근현대사와 관련된 책을 읽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2023년 여름, 날갯짓에서 제주 4·3항쟁 기행을 갔는데, 신입회원이
1931년 2월 21일 춘천에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이 성황리에 열렸다. 《매일신보》 강원지국과 《동아일보》 춘천지국이 공동으로 춘천공회당에서 개최한 공연은 말 그대로 입추의 여지도 없이 대만원을 이루었다. 《매일신보》는 그해 2월 26일 기사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개회 정각 1시간 전에 벌써 사방에서 운집한 관중으로 인하여 그처럼 큰 공회당도 문자 그대로 입추의 여지 없이 메어버리어 그 후로 속속 몰려드는 관중은 아직도 문밖에서 물결치고 있었으나 부득이 만원으로 입장을 시키지 못한 수백 관중은 혹은 문을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이 국방부와 육군사관학교의 정체성 논란으로까지 확전되는 양상이다. 국방부 장관은 육사의 정신적 뿌리가 신흥무관학교인지 국방경비사관학교인지 묻는 국회의원의 질문에 “국방경비사관학교”라고 당당하게 말했다.1945년 설립된 군사영어학교를 모체로 해서 1946년 설립된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와 조선경비사관학교를 거쳐 1948년 육사가 정식 출범했으니 엄밀하게 말하면 미 군정이 세운 군사영어학교가 그 뿌리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군사영어학교는 1945년 12월부터 1946년 4월 폐교할 때까지 약 110명의 졸업생을
“송암리에는 춘천군 내에서는 첫손가락을 꼽는다는 대지주가 있으니 그는 지규문 씨이다. 일찍이 신남면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청년단 고문에 추천되었으며 명실이 모두 이 동네의 주인격이다. 구한국시대에는 궁내부 주사도 지냈고 오랫동안 서울 뚝섬에서 살다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송암리로 옮겨와서 대궐같이 굉장한 저택을 짓고 73호라는 대가족을 거느리고 가위 왕 노릇을 하는 모양이다.”《매일신보》 1930년 9월 5일 기사는 이처럼 일제강점기 춘천 제일의 지주로 송암리의 지규문을 꼽았다. 기사에서는 192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낙후했던 송암
이 글은 차상찬이 1930년 5월 《별건곤》(통권 28호)에 쓴 것을 에서 현대어로 옮긴 것이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일제의 국권침탈이 노골화되던 중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시해사건과 연이은 단발령으로 민심은 더욱 나빠졌다. 이를 기회로 춘천에서는 정인회가 군인 성익환·상인 박현성 등을 주축으로 의병을 조직하고 첫 의병장으로 이소응을 추대하였다. 이들은 1896년 1월 18일 새벽, 강원도 관찰부와 춘천군 관아를 점령하고 의병을 모집하니 불과 3일 만에 그 수가 5~6천 명에 달하였다. 차상찬은 9세에
‘이슈칵테일’이 다섯 번째 주제로 최근 가장 큰 이슈인 ‘핵오염수’ 방류를 다뤘다.지난 8월 24일 후쿠시마 핵오염수 방류가 시작되면서 수산업계 분위기 침체뿐만 아니라 국민의 안전을 책임질 정부가 일본 정부 대변인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고 있다. 정부·여당은 “방류 상황을 지속해서 모니터링하고 있으며 국민 안전과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없도록 적시에 최선의 조치를 하겠다”라고 밝혔지만, 수산 먹거리 안전에 대한 우려와 일본 정부에 끌려간다는 비판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있다. 토론에는 전흥우 《춘천사람들》 이사장, 춘천
지난 24일은 둘째 아이의 생일. 공교롭게도 그날 오후 1시 무렵 일본은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방류했다. 아이의 생일을 핵 오염수 방류와 함께 기억해야 한다니 끔찍하다. 이를 적극적으로 저지해야 할 정부는 오히려 세금으로 영상까지 만들어 방류를 고무·찬양하고 있으니 해방 이후 이처럼 노골적인 친일정권이 있었던가!8월 18일, 미국 워싱턴 D.C.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정상이 3국 안보협의체를 출범시킨 직후 미국은 아무 거리낌없이 ‘동해’를 ‘일본해’로 공식 표기했다. 이에 질세라 살살 눈치만 보던 일본도 핵 오염수 방류를 전격적
1949년 3월 28일 오후 5시, 반민특위 강원도지부 조사부장인 김우종이 자신의 경호를 위해 채용한 호위경찰 김영택이 쏜 권총에 피격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단순 오발로 알았지만, 이는 오발을 가장하고 치밀하게 계획된 저격이었다.3월 3일 호위 경찰로 채용된 김영택은 반민법 해당자인 장아무개 일당과 내통하며 반민특위가 곧 해산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반민특위 타도에 앞장설 것을 서약했다. 김영택은 4.5구경 권총을 수리하는 체하다 김우종에게 방아쇠를 당겼는데, 다행히 김우종은 경상에 그쳤다. 병상에서 김영택을 수상히 여긴
강원도의 싱크탱크라 할 수 있는 강원연구원이 ‘아침공부포럼’ 강연자로 극우 인사들을 잇따라 초청하자 도내 야당과 시민사회에서 강한 반발을 보인 가운데, 지난 24일 대표적인 극우 학자로 평가받는 이영훈 전 교수의 강연이 강원연구원에서 예정대로 진행됐다.이영훈 전 교수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찬양해 논란이 된 인물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23일 논평을 통해 “이영훈 교수는 정신대가 조선총독부의 강제동원이 아니라 한국인의 자발적 참여로 이뤄진 상업적 공창이라는 망언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을 모욕했고, 일제 식민 통치를 찬양하고, ‘신민지근대
“우리의 독립운동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 자유와 인권, 법치가 존중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 운동이었습니다 … 따라서 우리의 독립운동은 인류 전체의 관점에서도 보편적이고 정의로운 것이었습니다.”그렇다면 독립운동을 탄압한 친일파들이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우리는 조국의 자유와 독립, 그리고 보편적 가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던 선열들을 제대로 기억해야 합니다.”그렇다면 그렇게 지켜낸 대한민국의 권력을 사유화하거나 총칼과 탱크로 찬탈해 30년간 국민의
“춘천을 길러낸 5대 은인의 공로!”《조선중앙일보》 1936년 7월 31일 3면 전면으로 기획된 에 대서특필된 제목이다. 기사는 이 다섯 사람이 그야말로 춘천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희생적 노력을 기울여 신연강교·소양강교·춘천고보·춘천고등여교 등 여러 굵직한 사업을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고 극찬했다. 기사에서 말한 5대 은인은 바로 일본인 山中友太郞·村上九八郞·久武常次 3인의 일본인과 최양호·지규문 2명의 조선인이었다.1928년 5월, 자본금 6천 원으로 춘천국자제조조합이 설립됐다. ‘국자麴子’는 ‘누룩’을 말한다.
1920년 6월 19일 오후 8시. 춘천예배당에서 춘천엡웟청년회가 조직됐다. 청년회를 발기한 사람은 유한익·홍종숙·지달원 등이었다.춘천엡웟청년회는 청년들의 지덕체를 기르고 상호 친선을 도모하는 동시에 교회 밖 청년들에 대한 선교를 활동목표로 정했다. 창립총회에서는 회장에 홍종숙, 부회장에 지달원을 선출하고, 종교부·자선부·문학부·사회부·운동부를 두어 각각의 부서장으로 최태곤·최태진·김형식·최태경·방희원을 선임했다(《동아일보》 1920년 7월 5일). 《매일신보》 1916년 9월 14일 기사를 보면 그해 9월 이전에 춘천엡웟청년회가
49편의 소설 속에 담긴 강원도 풍경을 따라가는 강원도 여행기 《헤이~ 강원도》와 지역 화가와 조각가 등 예술가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에세이로 풀어냈던 《그림에 붙잡힌 사람들 1·2》의 최삼경 작가가 첫 장편 소설 《붓, 한 자루의 생》을 펴냈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 최북(崔北·1712~1786)의 일대기를 통해 작가는 화려했던 시대의 그늘을 응시하며 아웃사이더의 운명을 타고난 예술가를 위로한다. 최 작가를 만나 단순한 괴짜 화가가 아닌 인간 최북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들었다.지난해 7월 강원도 대변인실 근무를
춘천에 전깃불이 처음 켜진 게 언제일까? 정확한 날짜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당시 신문 보도에 따르면 1925년 초봄 무렵 춘천에서 전등을 밝혔음을 알 수 있다.1920년대 이후 춘천의 전기는 원래 경춘전기철도주식회사의 부대사업으로 추진됐는데, 사업이 지지부진하면서 지역에서 직접 주식회사를 설립해 추진하자는 논의가 일었다. 1923년 8월 6일 춘천심상소학교에서 일본인 5명(山中友太郞·村上九八郞·萩野新助·今泉善天·佐佐木喜市)과 조선인 5명(최양호·이동근·이원영·태응천·김영모) 등 모두 10명을 창립위원으로 선정해 춘천전기주식회사가 발
1931년 7월 29일 《조선일보》에 “도규계 선구 리임수 씨”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춘천 읍내 관동의원장 리임수 씨는 강원도 도규계의 선구자로, 7~8년 전부터 춘천 읍내에서 개업하여 일반의 신망이 두텁다고 한다. 씨는 일찍 경성의전을 마치고 여러 해 동안에 많은 경험을 쌓아 그 기술을 일반이 인정하게 되었으므로 100여 리 밖에 있는 사람들도 그곳에 의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으로 찾아온다고 하며 씨는 정직만을 위주로 하고 빈한한 사람을 동정하므로 일반의 신임이 날로 더하여 가는 중이라고 한다.”‘도규(刀圭)’란 병을 고
3·1절 이후로 이어지는 윤석열 정부의 외교 참사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한쪽에서는 묵은 숙제를 해결했다며 환영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에 비유하며 아무것도 얻은 것 없는 굴욕적인 외교라 참사라고 평가하고 있다.춘천 지역에서도 길거리마다 다양한 의견이 게시된 현수막이 걸리고 서명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심이 들끓고 있다. 지난 3일 시청광장 앞에서는 ‘민주주의와 민생, 사회 공공성 실현을 위한 춘천공동행동’이 출범해 ‘외교 참사 비판 1000인 시국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선뜻 나서기에 주저할 법도 한 종교인들도 팔
3월 16일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한·일 정상회담은 일본의 주장만 관철된 일방통행 외교참패로 기록될 것이다. 윤 대통령이 한국의 국익과 일본의 국익이 제로섬 관계가 아니라며 향후 경제, 안보, 민간 교류 부문의 성과를 부각했으나, 국내 여론은 부정적 평가로 이어졌다. 이런 평가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지자 윤석열 대통령이 21일 역대 최장 국무회의 모두발언을 통해 한일관계 개선에 대해 직접 설명에 나섰다. 이날 오전 용산 대통령실에서 주재한 TV로 생중계된 국무회의에서 23분간 모두발언으로 설득에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