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집 거실은 공방 같았다. 작업대로 쓰는 책상이 거실 한 가운데 놓여 있었고, 뜨개질로 만든 인형들과 실들로 가득했다. “제가 굉장히 활동적인 사람인데 아파서 거동이 힘들었던 때가 있었어요. 그때 힘들었던 시기에 뜨개질하며 극복했어요.”직접 내린 커피와 쑥과 쑥가루를 넣고 만든 전을 내어주며 건네는 목소리는 활기차고 표정도 밝아서 오랜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듯 스스럼없이 편안했다.그는 다른 호칭이 불편하다며 자신을 모니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모니카는 대학을 진학하는 대신 서대문에 있는 노라노 양재학원에서 재단, 미싱, 디자인을
“잘 커줘서 고맙다. 우리 딸 장하네, 고맙다.”“알았어. 바빠, 나중에 통화해.” 어색하고 멋쩍어 서둘러 끊었다. 여지영(42) 씨는 이렇게 2019년 1월 1일 밤, 모든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는 엄마와 초등학교 1학년 때 헤어졌다. 그리고 네 명의 어머니가 생겼다. 아버지는 열네 살이나 연상이었던 어머니와 이혼을 하고 서울에 새 살림을 꾸리셨다. 지영 씨와 남동생은 춘천 할머니 댁에 맡겨졌다. 아버지의 재혼은 성년이 될 때까지 반복되었다. 쉽게 털어놓을 만한 가정사가 아닌데 그녀는 씩씩하고 당당했다. “저는 관종이에요(웃음).
“23일 평양역에서 출발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탑승한 것으로 추정되는 전용 열차는 중국 단둥역을 통과했다.”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에 전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던 때 소설《단둥역》을 집필한 최종남(73) 소설가를 만났다. 최 작가는 ‘꿈동이’ 인형극단의 해외공연을 주선하며 중국을 자주 방문했다. 단둥역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신의주와 마주 보고 있는 도시로 신의주청년역과 철도가 연결되어 있다. 손에 잡힐 듯 북녘 땅이 보이고 조선족을 비롯해 한국인 3천여 명, 북한 동포 2만여 명이 거주해 거리에서도 쉽게 북한
강원대학교 교정에서 신대수(65) 씨를 만났다. 굽이쳐 흘러 온 자리를 탓하지 않고, 갈 길에 조급함이 없이, 쉬지 않고 흐르는 강물같은 사람이었다. 이순(耳順)을 넘긴 2016년 8월, 강원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작년 여름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박사과정에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갤러리나 공연장에서 이따금씩 마주쳤던 그가 한국사회에서는 은퇴를 생각할 나이에 열 시간 이상을 책상에 앉아 학구열을 태우게 된 연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사실 갑작스러
“시집을 내겠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블로그에 일기처럼 시를 올렸어요. 가난한 엄마라 물려줄 재산도 없고 그간 어려운 시절을 지나오며 살았던 마음의 집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었어요. 제가 세상을 떠나도 아이들이 엄마의 집을 드나들 듯 그렇게 봐 주길 바라는 마음이었죠.” 먹고 사는 일이 절벽을 기어오르는 일처럼 고단한 삶이었다. 밧줄에 함께 매달린 어린 자식들과 한 고비 두 고비 넘기며 목구멍까지 차오른 숨조차 한번에 크게 내쉬지 못했다.그렇게 혼자 뱉어낸 넋두리가 시가 되었다는 《견고한 새벽》의 이경애(59) 씨를 만났다.《견고한
한국로타리 청소년연합 강원지사 김종학(59) 대표는 후평동에서 ‘한울스튜디오’를 운영하며 30년 동안 남춘천로타리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청년이었던 김 대표는 강산이 세 번 바뀌기까지 쉼 없이 달려왔다. 그 사이 머리도 희끗희끗해졌다. 조금은 느긋해지고 싶은 나이에 접어들었으련만 청소년들을 위한 봉사만큼은 욕심도 많고 하고픈 일도 많다.그는 인제군 신남에서 나고 자랐다. 부모님은 쌀가게를 운영한 덕에 시골이었지만 나름 유복한 막내 도련님이었다. 장날이 되면 그의 집은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산골에서 농사짓는
당림리(塘林里)는 신당을 모신 숲이 있으므로 당숲 또는 당림이라 했다. 당림1리 입구에 당숲마을이라 알려주는 표지판과 마을 주민이 가꾸는 꽃길이 반갑게 맞이했다. 들깨를 베어 널어둔 밭과 빈 들, 멀리 붉어진 산들에게 눈길을 주다가 이내 당림초교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에게 옮겨갔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일이 된 지 오래지만 이곳에서는 아이들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낙엽과 함께 뒹굴었다. 1935년에 개교한 당림초교는 마을 노인에게도 자랑이었다. 단 한 명의 입학생이라도 있다는 게 고맙다고 했다. 고향을 지키고 있는 노인회 할아버지들
가을의 문턱에서 김화존(80) 씨를 만났다.추곡에 사는 김씨는 ‘춘천사람들’의 조합원이고, ‘춘사톡톡’이란 독서동아리에서 매월 만나는 친구다. 식탁에는 이웃이 주었다는 복숭아가 정갈하게 놓였고, 《허형식 장군》이란 실록소설이 눈에 띄었다. 찾아온 젊은 친구에게 들꽃도감을 선물로 주었다. 해남이 고향인 어르신은 30대에 고향을 떠났다. 돈벌이를 위해 도시에서 살다 50대에 산골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람이 가장 적게 사는 마을이 어딘가 찾다가 품걸리, 청평리에 살다 아내가 20년을 앓고 난 후 세상을 떠나자 추곡에 터를 마련하고
버들개는 유포리의 옛이름이다. 냇가에 버들이 많아 버들 갯가를 의미하는 유포(柳浦)라 했다. 북으로는 배후령을 이고 동으로 마적산이 길게 누워 유포리의 3분의 2가 산지다. 유포리의 중심에는 아침못(조연저수지)이 있으며 그 주변은 볕이 잘 드는 들녘이다.발산리의 삼한골과 배후령의 무지골 계곡이 아침못으로 흘러드는데, 욕심 많고 못된 부자가 스님에게 능욕을 보이자 폭우가 며칠 동안 내려 집터는 커다란 못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아침못 저수지는 유포리와 산천리, 천전리의 농부들에게 젖줄이다.“전에는 둑도 그리 높지 않아서 둑방에서
점심 영업을 마치고 박물관에서 기다리는 홍웅기(54) 씨를 만나러 도착한 막국수체험박물관 주변은 메밀꽃이 한창이었다. 성인이 되어서야 이루어진 막국수와의 첫 만남은 난감 그 자체였다.. 별다른 양념도 화사한 고명도 없이 거무스름한 면과 멀건 동치미국물의 색 조합부터 구미가 당기지 않았고, 찰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면발은 입에 넣고 씹기도 전에 뚝뚝 끊어졌다. 허나 막국수의 그 슴슴함과 개운한 소박함, 쉬이 편안해지는 몸이 매력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춘천막국수협의회 홍 회장은 대를 이어 메밀을 재배하고 제분
남면 추곡리는 북으로는 수동리, 서쪽의 후동리와 발산리, 남쪽으로는 산수리, 동쪽의 광판리와 행촌리에 닿아 있는 마을이다. 춘천에는 큰 강이나 호수를 접하지 않는 마을이 드문데, 추곡리는 6개 마을의 한가운데에 들어앉아 있다. 마치 러시아의 포개지는 전통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포근한 춘천 속 또 하나의 작은 분지다. 이웃 마을을 넘나들던 옛길에 관심이 갔다. 물을 따라 가는 길이나 산을 넘던 고갯길을 유추해보며 지도를 하루 종일 들여다봤다.추곡고개를 넘으면 수동리와 소주고개 길을 만나 창촌, 강촌으로 연결되며, 추곡리에서 발원한
구름을 잔뜩 안은 하늘이 무거웠다. 충의대교에서 가정리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가정리 마을회관 앞 삼거리, 박암관천길 초입의 들녘은 어느새 노랗게 물들었다. 가을이로구나.박암관천길은 야트막한 산길이 홍천강 옆으로 누워 관천리 방하리로 이어진다. 마을도로에는 지나는 차들이 거의 없었다. 2km쯤 호젓한 길을 가다보니 오른편 임도(林道)가 손짓한다. 가정임도는 2009년 산불예방과 산림경영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임도는 가파르고 험했다. 600m쯤 오르니 갈림길이다. 오른쪽은 개인소유의 산지였다. 출입을 금하는 표지가 있었지만 문이 열
어질 인(仁), 산바람 또는 산에 이는 아지랑이 같은 기운 람(嵐). 인람리(仁嵐里) 한자의 의미가 맘에 들었다. 조선시대 성종 때 시인 망헌 이주의 인람정(仁嵐亭)이 있었으므로 ‘인람(仁嵐)’이라 했다고 한다. 춘천호의 물안개가 걷히고 가을 단풍이 호수에 드리우면 절로 시 한 수쯤 나오지 않을까!용산리를 지나는 407번 국도변 호수에 햇살이 드리우면 백사장 은빛 모래밭 같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고탄리 낚시터를 지나 솔다원 나눔터와 정자가 있는 삼거리에서 정자를 끼고 송암리로 들어섰다.노랗게 익어가는 들녘 위 뽀얀 뭉게구름 사이로
북산면은 소양댐 건설로 가장 불편하고 아픔이 많은 곳이다. 비옥했던 넓은 들은 사라지고 주민들은 산골짜기로 이주하거나 살던 고향을 버리고 타지로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내평리는 북산면사무소와 북산지서 등 중요시설이 있어 소양댐 건설 전에는 3천800여명의 주민이 살았던 큰 마을이었기에 그 아픔이 더했을 것이다.양구 가는 46번 국도를 따라 배후령터널과 추곡터널을 지나면 북산으로 들어가는 추곡삼거리가 나온다. 왼편 초입의 추곡초등학교를 지나 고개를 넘으면 현재 북산면사무소가 있는 오항리다. 오항리 뱃터 방향으로 가다보면 두 갈래
먼 길을 다녀왔다. 동홍천ic에서 인제 방면 44번 국도를 타고 원동2리로 접어들어 홍천고개를 넘어간다. 조교보건진료소를 지나자마자 나오는 삼거리 왼쪽길이 물로리 가는 물로 고갯길(삽다리고개)이다. 물로리(勿老里)는 예로부터 늙지 않는 골짜기라 하여 무로골, 무로곡(無老谷)이라 했다. 고갯길 초입에 들어서니 파란하늘 위로 쭉쭉 뻗은 일본 잎갈나무 숲이 가을바람처럼 선선하다. 고갯마루로 오를수록 구절양장이다. 사철가를 들으며 굽이진 길을 돌아설 때마다 가을꽃 추임새로 흥겹다. 하얀 면사포 같은 사위질빵 꽃 넝쿨, 톡톡 터지는 꽃향유의
때로는 스스로 고립되고 싶을 때가 있다. 그곳이 고요한 강이 흐르고, 짙푸른 강물 위로 백로의 날갯짓을 따라 시선이 멈추는 곳마다 가슴 출렁이는 풍경이라면 더욱 그러하리라. 407번 국도를 따라 북한강을 거슬러 오르면 고탄리에 있는 솔다원 나눔터와 정자가 있는 삼거리를 만난다. 정자를 끼고 좌측 마을길이 송암리를 거쳐 가일리로 가는 길이다.송암리의 정겨운 밭들을 지나 산고개가 시작되자 칡덩굴이 길까지 먹어 삼킬 듯했고 전봇대마다 칡기둥을 이루었다. 가일고개는 그동안 다녔던 어느 고개보다도 가파르다. 구불구불 힘겨운 고개를 넘어 내려
춘천에는 지명이 같은 마을이 여럿인데 신북읍에 있는 지내리(池內里)는 동면 지내리(枝內里)와 소리가 같다. 본래 춘천군 북내 일작면의 지역으로서 큰 못 안쪽이 되므로 지름물 또는 지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지내상리, 지내중리, 지내하리를 묶어서 지내리라 하여 신북면에 편입되었다. 사실 지내리는 오랜 전통을 가진 마을이다.성문 안이라는 마을 옛 이름은 고대 맥국과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의 지내리 이름은 도정촌(陶井村, 陶村)이었는데 질그릇을 만들던 가마터가 있었고 도정(질우물)은 마을 우물로 사용했다. 마을 북쪽에
춘천IC에서 동홍천IC로 빠져나와 인제 방면 44번 국도를 탔다. 누리삼 마을을 네비에 검색하니 소요시간이 한 시간 걸린다고 나온다. 이번 춘천마실은 여행이나 다름없다. 철정삼거리를 지나 약 10km쯤 가면 원동리로 이끄는 이정표가 있다. 좌회전을 하면 원동2리를 지나 한적한 홍천고개를 구불구불 넘어야 한다. 뿌리가 얕은 여름 들꽃들이 속이 타서 잎이 누렇게 변한 상태에서 모가지를 떨굴 때, 극심한 여름가뭄에도 뿌리 깊은 칡덩굴은 넓은 잎을 부채처럼 펼치고 길가로 휘휘 커튼처럼 드리우며 싱싱한 칡꽃을 뽐내고 있었다.드문드문 집들이
북한강변에 있는 작고 아름다운 원평리를 찾았다. 춘천댐이 건설돼 인공호수인 춘천호가 만들어지면서 마을이 수몰돼 마평천 하류 일대로 이주를 해서 그런지 마을의 집들은 오래된 집이 없었다. 마을길은 온통 꽃길이다. 걸어서 두어 시간이면 중심마을을 다 둘러볼 정도로 작은 마을인데, 집집마다 꽃밭이 예쁘고 논두렁과 밭두렁에도 해바라기, 백일홍이 여름을 이겨내고 있었다.5번 국도에서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마평뜰에 서 있는 38선을 알려주는 표지석과 ‘삼팔선의 봄’이란 민박집 간판이다. 38선 표지는 1970년대에 말고
춘천이 너무 멀어 한치고개 넘어 백양리 통해 가평을 오간 사람들 소주터널을 지난다. 충의대교 앞 오른쪽 길, 가정리다. 올여름 최고 기온 36℃까지 치솟은 날의 마실탐방이라 단단히 마음먹고 나니 따가운 햇살이 겁나지 않는다. 강의 유유함은 곧 수상스키의 물보라 부서지는 시원함으로 생기가 넘친다.고요한 시골마을, 강원학생교육원 앞 강변에 이르자 ‘골든 멍키’라는 수상레저시설이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몇 년에 한 번 쯤 마을에 들어온 가설극장 안으로 들어서는 어린아이의 눈동자로 화려한 시설물과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사실 신기할 것도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