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부는 날에는 발걸음을 멈추어본다. 평소에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마음을 스윽 스쳐 건너는 순간을 느껴보고 싶어서다. 교무실 밖 마당에 서보면 앞산을 휘돌아 내리는 바람소리가 일품이다. 바람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툭 건들며 지나고 그 건드리는 것들을 매개로 자신의 모양을, 소리를 만들어낸다. 그래서인가, 항상 어딘가에서 만나는 바람은 늘 새로운 모습이다.어느 한적한 숲속 암자에 매달린 풍경을 지나는 바람은 귓전에 풍경소리를 딸그랑 떨어뜨린다. 그 맑고 명징한 소리라니. 쇠에 부딪힌 바람소리가 나뭇잎사귀를 지나는, 바람이 흩뿌리는
형형색색의 오묘한 빛깔을 천지에 흩뿌려대던 자연이 한 가지 색으로 마무리되는 계절, 길고 긴 겨울을 지났다. 깊은 잠이 들었던 조용한 대지가 수런수런 깨어나는 계절인데 봄보다 먼저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도 꽃소식. 계절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찬란한 봄이다. 답답하고 뒤숭숭한 마음을 달래려 바람꽃을 찾아 나선 강촌 어귀에서 고개를 쏘옥 내민 노루귀를 만났다. 잔털이 보송보송한 보랏빛의 말간 얼굴을 하고 바람에 가볍게 몸을 흔들어대는 작은 들꽃. 생강나무 노란빛깔이 알싸한 느낌으로 나무에 번져난다. 정
전입, 전출이 확정되었고 교사들의 전보가 공지되었다. 사람이 나고 드는 2월은 매일 같은 공간이 구멍 뚫린 듯 허전하고, 매일 같은 풍경에 나무 한 그루 베어낸 듯 허전하다. 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과의 이별에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스르륵 주저앉는 시간, 문득 연노랑 빛깔 기억되는 이별의 장면이 떠오른다.부드러운 햇살이 창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공간, 평소답지 않게 말끔한 연노랑의 스웨터를 입은 지앙 선생님, 그리고 웬일로 깨끗하게 청소되고 정돈된 공간에서 선생님이 악보를 건네준다. 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샤오천이 연주를 마치자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아주 선하고 착해 보이던 사람이 있었다. 웃는 얼굴이 선량해 보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헌신적으로 잘해주던 그 사람을 나는, ‘나의 가브리엘’이라고 불렀었다.그리고 그는 나의 삶 속에서 함께 손잡고 걸어가며 어려울 때 서로 힘이 되어주는 도반일거라 믿고 있었다.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없는 어떤 상황이 되자 그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나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고, 그로 인해 나는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던 옛사람들의 말을 되
사진 한 장을 앞에 둔다. 넘실거리는 새파란 바다빛깔위의 하늘도 그대로 파랑이다. 영원히 만나지도 못하면서 서로 바라만 보다 닮았나. 파랑이 뚝뚝 듣는다. 무척 슬픈데 슬픔을 만져 줄 무엇인가를 찾다가 파랑색이 가득한 사진 한 장을 들고 한참 내려다본다. 어렸을 적엔 엄마가 우주였다. 슬퍼서, 무서워서 죽겠을 때도 엄마 품에만 들면 다 괜찮았다. 어느 날 엄마에게 찾아든 바람(風). 바람과 맞닥뜨린 엄마의 당황스러움과 두려움. 온 우주였던 엄마가 두려움과 충격으로 미세먼지처럼 작아져 버린 날, 나는 우주를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무
단풍이 진다. 이제 막 떠오르는 아침 햇살에 핏빛처럼 붉은 빛깔. 농염하면서도 어찌 저렇게 순할까. 어제는 그토록 현란한 붉은 잎사귀들이 오늘은 바닥에 새로 돋는 꽃처럼 떨어져 눕는다. 떨어져 내리는 것들이 텅 비어 있는 시간처럼 가볍다. 잠자리 날개처럼 얄팍한 무게로 일제히 쏟아져 내리는 건 지나간 시간들 인가보다. 그래서 저렇게 찬연한 빛깔로 처연할 수가 있는 거겠다. 가을 특유의 빛깔. 이별이 예고된 고혹적인 슬픔이 배어나오는 색.단풍나무 아래서 너무나 아름다운 붉디붉은 나뭇잎이 내리는 풍경을 보다가 꼭 이런 빛깔의 음악을 떠
모리스 라벨의 를 듣는다. 나는 왜 이 음악이 그렇게 지루하게 들렸을까. 내가 고등학교 때쯤 이었나보다. 라는 영화가 육림극장에서 상영되었었고 그 이후에 온통 이 음악 가 매일 만인의 입에 회자되었다. 도대체 어떤 음악이길래 하는 마음으로 처음 들었을 때는 불량한 오디오 시스템으로 인해 시작지점부터 아주 여리게 시작되는 음악이 들리지 않아 계속 볼륨을 키웠어야 했다. 연주가 진행되면서 다시 계속해서 볼륨을 줄여야 했다 자꾸 커지는 음량이 너무 시끄러워서. 내가 처음 만난 는 그랬다.
빈 옥수숫대가 버스럭 거리는 밭 가장자리에 서서 바람을 듣는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휘저어대는 소리. 구석으로 깊숙이 밀어두었던 생각의 파편들이 다시 의식으로 떠올라 자꾸만 마음이 아파오는 소리다. 게다가 저무는 빛깔이 하늘을 태울 듯 붉게 번지는 시간이라니.얼른 이어폰을 꺼내 음악을 온 몸에 수혈한다. 이런 날은 이 딱 이다. 이 음악은 로시니(Gioacchino Antonio Rossini)의 오페라
창문에 앉은 매미가 따갑게 울어댄다. 가뜩이나 더운 여름철, 더위를 배가 시키는 그 소리에 살짝 짜증이 나다가도 안쓰럽다. 두터운 굼벵이 갑옷을 벗어던지는 매미를 처음 보았을 때 깜짝 놀랐었다. 처음 허물을 벗어난 매미의 날개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여리고 보드라운 풀색 빛깔로 비단처럼 예뻤다.어디서 저런 빛깔을 입고 왔을까 생각하는 찰나 금방 갈색으로 변하던 그 안타까웠던 순간, 나는 제르트뤼드(앙드레 지드의 소설 《전원교향악》의 주인공)를 떠올렸다. 눈이 보이지 않던 그녀에게 세상의 모습과 색깔을 언어로 그림 그리듯 설
소설 《채식주의자》를 읽다가 이 책이 영화로 만들어졌다면 아마 보는 중간에 나와 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의 내면에 깊숙이 숨겨둔, 아프고 두려워 없는 듯이 살고 싶은 상처 같은 존재 영혜.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모양새를 과감하게 드러낸 내용 때문에 은밀하게 덮어둔 내 아픔이 들켜버린 것 같아서였을 것이다. 평범함을 벗어난 일상에 대한 두려움, 무언가 나쁜 것이 나를 덮쳐버릴 것 같이 내 속에 스멀거리며 기어 나오는 기분 나쁜 느낌.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 전 보았던 영화 “마농의 샘”이 생각났다. 예쁜 딸아이와 함
바람이 분다. 애기 연두빛깔을 키운 오뉴월의 햇살이 바람에 날려 천지가 온통 초록으로 흔들린다. 계절이 가고 계절이 온다. 이 단순한 명제가 어쩌면 복잡하고 어려운 세상사의 기본 바탕이 아닐까. 계절이 흐르는 초록 그늘에 앉으니 바람이 슬쩍 말을 걸어온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라고.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바흐도 그 옛날 이 바람이 전하는 말을 들었을까? 문득 그의 프렐류드(prelude: 전주곡)가 생각난다. 작곡가 바흐가 아주 단순한 화음으로 음을 구슬처럼 꿰어 목걸이를 만들 듯 아르페지오로 펼쳐놓은 음악. 평균율
달빛이 향으로 번지면 이럴까? 짙은 청록에 하얀색을 조금 풀어 넣은 빛깔의 향.백매(白梅)가 막 벙그러진 매화 밭엔 꽃몽오리 빛깔을 닮은 향이 가득하다. 깨끗하고 맑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꽃, 구슬처럼 알알이 맺힌 매화 봉오리 사이에 말간 얼굴을 내밀고 피어있는 매화송이와 눈을 맞추며 이리저리 거닐다 보니 달을 바라보며 기원을 올리던 여사제의 목소리가 마음속에 가득 차오른다. 순결한 여신이여, 당신은 이 신성하고 아주 오래된 나무들을 은빛으로 물들입니다. 우리에게 구름도 없고 베일도 쓰지 않은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소서. 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