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고려 말 이방원이 충신 정몽주에게 읊은 시 ‘하여가何如歌’. 이방원이 전하고자 했던 포인트는 ‘누리리라’ 부분이다. 그 것도 백 년이나! 정절이고 나발이고 나와 함께하면 한 평생 권력을 보장하겠다는 달콤한 언변이 꼭 누구를 떠올리게 된다. 이방원과 달리 그가 꾀는 대상은 국민이다. 이방원은 우회적인 기교와 느긋함을 동반한 얽힘의 논리로 화해를 갈구하고 있다. 내가 떠올린 그 역시 기교와 여유를 장착한 네거티브로 국민을 꾀어내고 있다
‘귀안歸雁’은 고향을 떠난 시인 두보가 지은 망향 시다.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첫 설을 보내자니 새삼스레 두보의 시가 가슴에 닿는다.봄에 와 있는 만리 밖의 나그네는 난이 그치거든 어느 해에 돌아갈까 강성의 기러기 똑바로 높이 북쪽으로 날아가니 애를 끓는구나친정어머니는 갓난아기일 때 외할머니의 품에 안겨 만주로 이주했다. 노년을 우리 집에서 보내신 외할머니와는 추억이 많다. 중국은 시어머니를 모시는 집도 있지만,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집도 많다. 외할머니는 공무원으로 일과 살림을 병행하는 어머니 대신 살림을 맡아주셨는데 명절
재단법인 춘천지혜의숲이 무엇을 하는 곳이냐고 물었을 때 처음 듣는 사람들은 ‘나무를 심고 키우는 곳!, 혹은 도서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반면에 사업 내용을 말하고 기관 이름이 어떠냐고 물으면 사업 취지에 맞는 멋진 이름이라고 말한다.춘천지혜의숲(이사장 신용준)은 신중년과 노인 세대의 맞춤형 생애 재설계를 지원하고 성공적인 노후 생활을 위한 사회활동과 일자리를 지원하기 위해 2021년 1월 춘천시가 설립한 기관이다. 신중년과 노인 세대가 지닌 지혜와 경험이 지역사회에 환원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특히 노인 세대의 경우
2년 전 한 공중파 방송에서 ‘곰손카페’를 운영할 스태프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냈다. 곰손카페의 직원들은 손님들에게 얼굴을 내보이지 않고 오로지 털이 숭숭 난 곰손으로만 손님들과 소통한다. 희한한 운영 방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카페의 구인 조건을 보면 왜 그런지 이해할 것이다. 바로 1년 이상 타인과 관계를 맺지 않았거나 일정 공간 안에서만 지낸 ‘은둔 경력자’만 곰손 카페에 지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 2주간의 모집 기간에 무려 7백여 명의 청년들이 지원했으며 17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스태프들들은 좌충우돌하며
러시아에서 봄이 언제 시작하는지 묻는다면 질문에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봄에 대한 개념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봄의 시작은 먼저 기온이 영상으로 오르고, 눈더미가 녹기 시작하며, 겨울에는 느낄 수 없었던 다양한 냄새로 공기가 가득 차는 시점과 관련이 있다. 러시아에는 “봄은 누가 어디에 똥을 쌌는지를 보여준다”라는 농담이 있는데, 이는 눈이 녹으면서 땅이 드러나는 봄의 시작을 잘 설명하고 있는 말로 비밀은 결국 밝혀진다는 뜻이다.하지만 춘천의 거리는 연중 눈이 쌓여 있지 않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2021년 1월, 춘천이 법정 문화도시로 선정됐다. 그 후 3년간 춘천문화재단 문화도시센터는 ‘시민이 낭만 이웃으로 전환하는 문화도시 춘천’을 비전으로 삼아 의미 있는 삶의 변화를 지향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진심과 정성을 다해왔다. 지역문화의 성장과 확장을 위한 ‘사람 경영’, 도심의 작은 빈집과 빈 상가를 활용해 시민의 문화 활동을 연결하는 ‘문화 슬세권’, 호수와 축제 자원을 결합한 ‘특화 콘텐츠’ 사업으로 춘천만의 매력과 이미지를 전국적으로 전파하고 있다. 이러한 성과는 2023년 최우수 문화도시라는 평가를 통해 더 널리 인
잘 모르는 사람의 무덤에 헌화했다. 목발을 짚은 허름한 사내가 등장하자 말끔한 사람들의 입가에 옅고 온화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경외를 품은 행동처럼 보였는데, 마치 청룡영화상에서 배우 안성기가 공로상을 받았을 때 후배 배우들의 마음가짐 같아 보였다. 사람들은 그를 ‘서림 형님’이라고 불렀고 몸이 좋지 않아 보였던 그이의 건강이 쾌차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나환목. 어릴 적 강변에서 불발탄 폭발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뒤 평생 장애를 딛고 살았던 사람. 1986년 강원대 앞에서 사회과학서점 ‘춘천서림’
지난 60여 년 동안 우리는 국가 주도의 자원 집중과 인적 자원의 동원체제를 통하여 최대한 능률적 성장을 만들면서 세계가 놀라는 ‘위대한 한강의 시대’를 열었다. 동시에 우리는 세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수도권 초집중과 소득과 자산 격차로 인해 ‘성공한 국가와 행복하지 못한 국민’이라는 질곡을 겪고 있다. 참여하는 시민은 있으나 자치하는 주민은 없는, 선거 중심의 정치로 왜곡되어버린 민주주의에 불신과 염증만 키우고 있다. 민주화 이후의 선진국에 태어난 세대는 그들만의 라이프 스타일이 사회 변화의 에너지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미
정치권에서 종종 노인 비하 발언으로 노인들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거나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기는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의 저출생·고령화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 전반적으로 미칠 영향, 특히 향후 경제문제의 측면에서 어떤 돌파구를 찾아보자는 발상에서 비롯된 발언인 것 같다.대한민국은 인구의 20% 이상이 노인인 초고령사회를 코앞에 두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노인 인구는 모두 95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8.4%였고, 2025년에는 1천5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20.6%를 차지해 초고령사회에 진입하고, 2035년에
내가 태어난 일본 시골에서는 농사만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없어서 전업으로 논농사를 짓는 집보다 직장을 다니면서 농사를 짓는 집이 대부분이었다. 일본에서는 집집마다 자동차 2~3대와 이앙기·콤바인·건조기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의 시골 마을에는 자가용도 많지 않았고, 바인더로 벼를 베는 풍경을 보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한국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함께 농기계를 사고 서로 도우면서 사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벼를 베고 며칠 지나서 볏짚을 뒤집는 일이 있었다. 남편은 안 해도
춘천사회혁신센터에서 5년 동안 일했습니다. 우리는 사회혁신이 우리가 당면한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새로운 솔루션을 생각하고 용기 있게 시도해 보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빈곤·기후위기·고령화 같은 시대의 큰 조각들은 해결방안을 만들기 어려웠습니다. 폐지수집 리어카 개선, 일회용 플라스틱 재생, 이웃 관계망 구축 같이 일상의 구체적인 불편으로부터 고민해 왔습니다.요즘은 지역이라는 말 대신 ‘로컬’이라는 단어가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솔루션보다 로컬의 매력을 보여주는 콘텐츠가 더 필요하
‘여배우의 품격’, ‘신사의 품격’, ‘대한민국의 품격’, ‘대상의 품격’, ‘정치인의 품격’, ‘영부인의 품격’···. 쏟아지는 기사들 속,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품격’이다. 이 단어는 종종 도시와도 연결돼 시민들의 자부심을 끌어올리는 수단으로도 쓰인다. 얼마 전, 카톡으로 전달된 포스터에서 같은 단어를 발견했다. 너무나도 익숙한 ‘문화도시 춘천’ 앞에 ‘고품격’이란 단어가 떡하니 붙어버린 것이다. ‘고품격 문화·관광도시’란 문장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 함께 일하는 후배에게 어떠냐고 물어보니 대뜸 이렇게 대답한다
한국에서 벌써 다섯 번째 겨울을 맞는다. 이번 겨울은 폭설이 잦다. 오늘은 출근해서 상담소 주차장에 쌓인 눈을 밀었다. 지난해 꽃을 피웠던 라일락 나무와 배롱나무에도 눈이 쌓였다. 나무 밑을 지날 때면 가지 끝에 쌓였던 눈가루가 바람결에 떨어졌다. 필리핀에서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풍경이다. 필리핀의 어머니와 동생에게 이곳의 겨울 풍경을 사진 찍어 보냈다. 특히 라일락 가지를 흔들어 눈이 떨어지는 모습을 찍었다. 상담소 동료들이 내가 눈을 밀대로 미는 모습도 찍어주어 함께 보냈다. 어머니의 놀라는 모습이 이모티콘과 함께 답장으로 왔다
춘천시주민자치지원센터장으로 취임한 게 지난해 4월이었으니 어느새 9개월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 해가 바뀌었다. 세월의 빠름을 새삼 절감한다. 취임과 동시에 이미 예정되었던 이사회를 통하여 정관을 개정하고 재단 명칭을 바꾸고 전국 최초로 전담지원관 제도를 시범으로 시행하는 등 재단의 고유 사업을 수행하고 산적한 과제를 해결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한 해를 마무리하고 나서야 잠깐이나마 한숨 돌리며 차분히 뒤를 돌아보고 센터장으로 취임할 당시 구상했던 계획들을 다시 되새겨 본다. 춘천의 주민자치 발전을 위해 구상했던 추진 전
내 꿈은 작가였다. 중학교 교지에 단편소설을 실은 이후 대학에 가서는 시 동아리에 들어가 장르를 변경해 보았으나 문학에 뛰어난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성실한 독자로 살기로 했다.어릴 때는 동화를 많이 읽었다. 집에 이원수 아동문학 전집이 있었는데 그 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 더 읽을 책을 찾으러 도서관에도 가고 동네 서점에도 갔다. 가장 기억에 남는 책방은 ‘미운 돌멩이’다. 1990년대 초 전국에 생겨난 어린이 전문서점 중 하나였는데, 5평 정도밖에 안 되는 책방에는 볕이 잘 들어 항상 따뜻했고, 책방 선생님은 책갈피 같
놀랍게도 올겨울 춘천에서 눈이 자주 내린다. 아마 많은 운전자와 심지어 보행자도 자주 내리는 옥설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도로는 미끄럽고 위험해지며, 자동차와 옷에는 더러운 자국이 남는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면 도로와 아파트 마당은 하얀 눈에서 벗어난다. 최근에 눈이 내렸다는 것은 눈으로 덮인 꽃밭과 들판만이 상기시켜 줄 것이다.나는 비록 러시아 출신이지만, 내 고향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눈이 그렇게 자주 내리지 않는다. 눈이 내릴 때도 강한 바람 때문에 눈이 도시의 거리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에 폭설이
춘천에는 예술가들의 창작을 지원하는 레지던시가 두 곳 있다. 하나는 옛 기무부대 관사를 창작공간으로 바꾼 ‘춘천예술촌’이고 다른 하나는 춘천문화재단 레지던시 예술소통공간 ‘곳’이다. 나는 2022~23년 예술소통공간 ‘곳’에 입주해 전통서예와 전각으로 창작활동을 이어왔다.전각과 서예가로서 전통에 바탕을 둔 창작활동을 해 왔다. 인십기천(人十己千), 남들이 열 번을 하면 나는 천 번을 노력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많은 시간과 공을 작품창작에 쏟았다. 그러나 전통서예작품이 전시장에서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어려웠다. 공을 들여 내놓은
요즘 무척 고독하다. 이래저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큰애는 휴학 중이다. 군대를 마치고 학교에 복귀하지 못한 것인데 아비로서 죄책감도 있고 면구스럽기도 하다. 가끔 같이 소주 한잔하면서 세상살이에 관해 얘기하곤 하는데 요즘 주된 화두는 이른바 ‘이준석 신당’이다. 시민운동을 하는 엄마와 평생 책을 파는 일을 하는 아빠를 둔 녀석은 나름 ‘깨어있는 부모’ 밑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셈인데, 문제는 자칭 ‘깨어있는 자들’의 위선이 뭔지를 일상적으로 보고 잘 간파한다는 점이다. 간혹 부모의 말과 행동이 다를 때 발생하는 난감한 때때를 이
14일 동안 격리됐던 방을 벗어나 제일 먹고 싶었던 건 맛있는 고기와 치킨이었다. 6개월 내내 지내야 하는 강원대 국제생활관에 짐을 두고 유심카드도 없고 인터넷도 없어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던 나는 맛있는 음식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녀야겠다는 생각에 기숙사를 나왔다. 내 생각이 맞았는지 먼저 도착한 곳은 강원대 후문이었다. 당시 강원대 후문은 강원대 학생들이 낮에는 커피 마시면서 공부하고, 점심 먹고 저녁에는 술을 마시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곳인지 몰랐다. 목적지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먼저 도착한 곳은 강원대 후문에 있는
많은 이들이 떠나 빈 상가가 더 많은 동부시장 한 귀퉁이. 이상한 밥집이 하나 새로 문을 열었다. 밥집의 이름은 ‘모두의 부엌-춘천’. 남자 둘이 운영하는 이곳의 점심시간 풍경은 조금 이채로운데 손님의 대부분이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라는 점과 또 가게 앞에는 자전거가 몇 대 세워져 있다는 점이다. 이곳에서는 수준급의 잔치국수와 카레라이스를 6천 원에 판매하고 있는데 메뉴판에는 ‘특별가 3,500원’이라는 글귀가 있다. 대학생 이하 청소년, 65세 이상 어르신, 자전거를 타고 온 손님에게는 특별가로 제공한다. 식당에서 1만 원 이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