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척 고독하다. 이래저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큰애는 휴학 중이다. 군대를 마치고 학교에 복귀하지 못한 것인데 아비로서 죄책감도 있고 면구스럽기도 하다. 가끔 같이 소주 한잔하면서 세상살이에 관해 얘기하곤 하는데 요즘 주된 화두는 이른바 ‘이준석 신당’이다. 시민운동을 하는 엄마와 평생 책을 파는 일을 하는 아빠를 둔 녀석은 나름 ‘깨어있는 부모’ 밑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셈인데, 문제는 자칭 ‘깨어있는 자들’의 위선이 뭔지를 일상적으로 보고 잘 간파한다는 점이다. 간혹 부모의 말과 행동이 다를 때 발생하는 난감한 때때를 이
14일 동안 격리됐던 방을 벗어나 제일 먹고 싶었던 건 맛있는 고기와 치킨이었다. 6개월 내내 지내야 하는 강원대 국제생활관에 짐을 두고 유심카드도 없고 인터넷도 없어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던 나는 맛있는 음식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녀야겠다는 생각에 기숙사를 나왔다. 내 생각이 맞았는지 먼저 도착한 곳은 강원대 후문이었다. 당시 강원대 후문은 강원대 학생들이 낮에는 커피 마시면서 공부하고, 점심 먹고 저녁에는 술을 마시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곳인지 몰랐다. 목적지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먼저 도착한 곳은 강원대 후문에 있는
많은 이들이 떠나 빈 상가가 더 많은 동부시장 한 귀퉁이. 이상한 밥집이 하나 새로 문을 열었다. 밥집의 이름은 ‘모두의 부엌-춘천’. 남자 둘이 운영하는 이곳의 점심시간 풍경은 조금 이채로운데 손님의 대부분이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라는 점과 또 가게 앞에는 자전거가 몇 대 세워져 있다는 점이다. 이곳에서는 수준급의 잔치국수와 카레라이스를 6천 원에 판매하고 있는데 메뉴판에는 ‘특별가 3,500원’이라는 글귀가 있다. 대학생 이하 청소년, 65세 이상 어르신, 자전거를 타고 온 손님에게는 특별가로 제공한다. 식당에서 1만 원 이하의
로컬푸드를 간단히 정의하자면 소비자의 인근 지역에서 생산 및 공급되는 농산물이다. 우리말로 풀면 지역 먹거리다. 로컬푸드라는 사회운동적 개념은 1990년대 초 유럽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로벌’ 푸드가 지배하는 시스템에 대항하는 반작용으로 20세기 말 로컬푸드라는 개념이 굳이 등장했다. 로컬푸드는 전통적인 먹거리 수급체계로 회귀하자는 주장이다. 전적으로는 불가능하니 아주 일부라도 말이다.비슷한 주장은 있었다. 농협은 1990년대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는데, 지역 개념은 없고 국산 농산물을 더 아껴달라는 넓은
한 해의 마지막 밤 자정이 되면 제야의 종이 울리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됩니다. 많은 사람이 한 해의 희로애락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해를 맞는 설렘으로 잠들지 못합니다. 한 해의 마지막 밤을 의미하는 ‘제석除夕’ 또는 ‘제야除夜’에는 지난 한 해 동안 짊어졌던 삶의 짐을 덜어내거나 모든 은원 관계를 말끔히 청산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부뚜막이 헐었으면 고치고,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고, 쓰레기를 모아 모닥불을 피웠다고 합니다.지나온 과거보다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새해 첫날 일찍 일어나 떠오르는 첫 태양을 맞이합
첫아이를 낳은 1994년 8월은 기록적인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해였다. 출산 전날 병원에서 정기검진을 받았을 때는 이상 없이 괜찮다고 했는데, 다음 날 아침부터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기 시작했다. 결혼 전에 신장결석으로 앓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와 비슷한 통증이어서 걱정이 되었던 나는 남편에게 결석 때문에 아픈 것 같으니 병원에 가야겠다고 했다.병원에 도착하니 임산부임을 알고 진통이 아니냐고 물었지만, 첫 임신이라 몰랐던 나는 과거에 결석을 앓은 적 있는데 그 통증이랑 같아서 가지고 있던 진통제를 먹었다고 말했다. 간호사는 산도가 열
‘기레기추적자’라는 이름을 내건 SNS 페이지가 있다. 꾸준히 극악한 언론의 민낯을 알려주며 잘못된 기사의 팩트를 바로잡아주는데, 강도 높은 비판과 유머가 반 스푼 정도 섞여 있어 보는 재미가 있다. ‘조중동’의 편파 보도와 황색저널리즘에 화가 나 있는 이들에겐 그야말로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그런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피습사건 직후 페이지 운영자는 본인 계정에 “기레기추적자 페이지를 시작한 지 햇수로 8년 됐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이 가장 참담합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수많은 가짜뉴스를 고발하면서 늘 유머러스한 모습으로
상담소를 개소하던 첫해, 중앙로 67번길 54번지를 찾아온 여성이 있었다. 좁은 골목으로 아직 차가운 냉기가 남아있던 봄날, 소매를 여러 겹 접은 셔츠를 거친 그녀가 상담소 문을 두드렸다. 긴 셔츠를 들어 올리자 압박붕대 아래 먼 나라의 지도처럼 흩어진 푸른색의 타박상, 늑골이 부러진 그녀가 올라오기에 상담소의 언덕은 괜찮았을까.가슴에 압박붕대를 한 스물네 살의 그녀는 베트남에서 이주한 지 이제 1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90일이었던 국민 배우자 비자를 한 번 연장했고, 연장 기간은 1년이었다. 체류가 허락된 1년 동안 그녀는 착하고
2015년에 일자리를 구해 춘천에 정착한 지 8년이 넘었다. 해가 바뀌면 햇수로 10년이다. 10년이면 타향도 고향이나 다름없다.올해 춘천시에서 춘천시지속가능발전위원회 위원을 추가로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이미 신북읍주민자치위원으로 공적 영역의 자원봉사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고, 춘천시에서 운영하는 ‘SDGs(지속가능발전목표) 시민대학’ 2기 과정을 수료하고 해당 강사과정 교육까지 마친 뒤라 춘천을 위해, 또 나 자신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란 생각에 위원모집에 지원했다. 시민대학과정을 공부했던 다른 동료들도 위원모
2018년 봄, 정당에 가입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2016년 겨울 정권교체를 외치며 유모차를 함께 끌던 친구들과 같이 활동하고 싶었다. 정당 지지율은 15%가 넘었고 함께하는 이들은 모두 비슷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2023년 현재 지금은 당원이 아닌 이들도 있고, 다른 정당으로 간 이들도 있고, 지금은 세상에 없는 이들도 있다.2019년 춘천으로 오면서 정당에서 당직을 맡아 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당 지지율은 꾸준히 내려갔다. 분위기는 점점 꽁꽁 얼어붙고 풀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나만 잘못한 것은 아니겠지만, 정
2023년이 이제 막 끝나가고 있다. 올 한 해를 오롯이 춘천에서 보냈다. 올해는 다양한 사건들로 가득 찼다. 그중 일부는 기쁜 일이었고, 일부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일년 내내 정말 새로운 경험을 많이 쌓았다. 예를 들어 최초로 경찰관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범죄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조사로 내 자전거를 돌려준 수사관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또한, 나는 처음으로 응급실에 가보았다. 믿기 어렵겠지만, 한국을 여러 번 방문해 꽤 오래 사는 동안 병원에 입원할 일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가족을 데리고 오면 이런 일
지난달 22일 개봉한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 3주 만에 750만 관객을 동원해 1천만 관객 돌파를 향해 순항 중이다. 사람들은 왜 이 영화에 열광할까. 지금으로부터 꼭 44년 전인 그 겨울의 참혹했던 우리의 정치사는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 걸까.이 영화는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즉사해 갑자기 발생한 권력 공백 상황에서 군부 내 전두환의 사조직인 하나회가 그해 12월 12일 밤 나라를 도적질한 아홉 시간을 다룬다. 그런 역사적 비극의 한 조각 퍼즐을 나는 잘 몰랐다. 그
끝내 무전기 답신은 오지 않았다. 30년 전 그날, 비가 부슬부슬 오던 태백의 아침을 기억한다. 군대를 갓 제대한 22살의 측량기능사는 늘어진 고압전선에 스타프(함척函尺)가 닿아 절명했다. 함척의 길이는 5m였는데 비탈밭의 경사 각도와 관리가 안 돼 늘어진 고압선의 높이가 가장 불균형을 이루는 바로 그 지점에서 감전이 일어났다. 나는 여태껏 그렇게 침묵과 고요로 침잠된 장례식장을 기억하지 못한다. 나를 포함한 직장 동료들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안주 삼아 깡 소주를 들이켰는데, 거기에는 내가 아니어서라는 안도감과 고압선을 허술하게
봄입니다. 봄이 왔습니다.노란 산수유 눈 비비는 소리에 기다리지 않아도, 때론 잊고 있어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봄이건만 이 봄이 이다지도 반가운 까닭은 코로나19가 삼켜버린 지난 한 해를 이제라도 꾹꾹 채우고 싶어서인가 봅니다.남녘에서 올라온 부지런한 봄바람이 하루를 바삐 여는 우리 집 창문을 기웃거립니다. 산 밑에 들어서고 있는 전원주택 길모퉁이에 청설모 한 마리 머뭇거리다 쏜살같이 숨어버리고 물오른 나뭇가지에 앉은 작은 새 한 마리 문안 인사에 오늘 하루가 행복으로 채워질 것들을 예감하면서 어르신 한 분, 한 분 안부를 챙깁니다.
6개월 동안 있어야 할 강원대 국제생활관으로 가기 전에 코로나 격리 때문에 14일 동안 국제생활관 옆 건물인 국제인재양성관에 머무르게 되었다. 배가 비어 있는 상태로 기숙사에 도착해 방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담당 선생님이 나와 내 이름을 확인하고 방을 알려주었다.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 배는 고픈데 나는 ‘먹을 것도 안 가져왔고 배달도 시킬 수 없는데 어떻게 하지?’ 생각하면서 방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때 마침 담당 선생님이 “보보쩌, 밥 먹었어요? 도시락 가져가세요”라는 말해 너무 행복했다.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의 호평과 화려한 ‘라인업(lineup)’에 영화를 보게 되었다. 1979년 12·12쿠데타와 신군부의 정권 장악에 관한 내용은 수업시간에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 전개 과정을 알게 된 것은 이 영화를 통해서였다. 영화이기에 어느 정도 소소한 내용은 바뀌었을 수 있겠지만, 그해 12월 12일 그날의 길었던 서울의 밤이 어떠했는지 아주 자세히 묘사되었다.영화를 다 보고 나서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지 않고 화가 났다. 영화 초반부에는 실제 인물들과 이름이 다르니 빠르게 몰입해 집중해서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영화에
춘천시민들의 로컬푸드. 1차는 춘천산 농산물과 가공품, 2차는 인근 화천·양구·홍천·인제의 먹거리, 3차는 강원도 전체로 확장된다. 춘천시민이자 강원도민으로서 “기왕이면 우리 지역 먹거리지!”라는 정감은 너무 당연하다. 문제는 소비 선택의 순간과 원만하게 매칭이 되느냐인데, 여기서부터는 의외로 어렵다.일단은 ‘유통구조의 문제’라고 답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생산부터 최종 소비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변수와 관행과 모순이 얽혀 있다. 오래 엉켜 굳어진 실타래지만 그래도 실마리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은 지난 먹거리운동의
30년 전 겨울에 춘천에 온 뒤 1993년 4월 17일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결혼식 며칠 전은 벼의 모종을 준비하는 날이었는데, 모든 게 서툴렀던 나는 점심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것도 몰랐다. 친척 형님의 “동생, 점심 다 준비했어?”라는 말에 놀라 당황스러워 냉장고를 열어보았지만, 냉장고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함께 사는 형님은 결혼식 음식 준비 때문에 시내에 나가고 없었기에 혼자 어떻게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지 몰라 식은땀을 흘렸다. 다행히 일을 도우러 온 6촌·8촌 형님 덕분에 점심 식사를 내갈 수 있었다.며칠
춘천은 2021년 법정 문화도시로 지정된 이후, 문화와 예술이 본격적으로 시민의 삶의 영역으로 확장하고 시민 스스로 문화예술의 욕구를 발현하며 해결해나가는 등 도시 차원의 전환을 위한 노력을 꾸준히 지속해왔다. 문화예술교육 역시 이러한 춘천지역의 흐름에 발맞춰 기존 장르·감상 중심 문화예술교육의 한계를 벗어나 지역 문화예술교육으로서의 역할과 쓰임, 확장의 가능성을 재정립하였다. 특히 문화예술교육의 주 대상이었던 향유 기회가 부족한 취약·소외계층에 한정하지 않고 내가 사는 삶터에서 누구나 함께 일상적으로 문화예술교육을 누릴 수 있도록
“또야?” 차를 몰고 거리를 지나다 보면, 익숙한 얼굴들이 마치 춘천의 ‘공인’인 것처럼 인사를 건넨다. 현수막 속 얼굴들이 익숙하다면 이 거리의 전쟁이 무덤덤해졌다는 뜻일 거다.약 한 달 전, 정당 현수막 난립을 막기 위한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이 행안위에서 통과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개정안은 정당 현수막 설치 개수를 읍·면·동 단위별 2개 이내로 제한하고, 설치 장소는 보행자와 교통수단 안전을 저해하지 않는 선으로 규정했다. 또한, 현수막 설치 기간이 만료되면 신속히 자진 철거해야 한다는 점이 포함됐다. 만약 이 개정안이 국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