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된 조국, 귀국하는 남자들의 행렬에 여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정신대 소녀들은 어찌됐나요?”
“걔네들, 위안부야!”


1945년 드디어 일본이 패망했다. 부친의 요양 차 맑은 공기를 따라 갔던 강원도 고성을 떠나 서울로 돌아왔다. 전쟁 끝 무렵 선생이 다니던 대학에도 정신대 소집령이 내렸다. 많은 학생들이 이를 피해 자퇴를 했고, 윤정옥 선생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이제 해방된 내 땅에서 다시 학업을 할 수 있다는 마음에 젊고 총기어린 여성은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당시 서울역은 매일 일제의 징집으로 노역을 하거나 학도병으로 끌려갔던 이들의 귀국으로 붐볐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여성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정신대로 끌려갔던 또래의 친구들이 선명히 기억되는데, 돌아오는 기차엔 아무도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윤정옥 선생은 수업이 끝나면 그저 혼자서 역으로 가서는 아무나 붙들고 물었다. “정신대 갔던 소녀들은 어찌됐나요? 왜 안 오지요?” 정신대 여성들의 행방을 물을 때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며칠이 지나서야 한 중년의 사내가 한 마디 내뱉었다. “걔네들, 위안부야!” “위안부요?” 처음 듣는 말이었다. 대체 누구를 어떻게 위안한다는 것인가. 그리고 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인가. ‘정신대’라는 허울 좋은 가면 뒤에 숨겨진 우리 소녀들에 대한 성적 착취와 유린의 민낯인 ‘위안부’문제는 이렇게 한 여학생의 질문을 시작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사진=김남덕 시민기자

영문학을 공부해 대학교수로 있으면서도 선생은 ‘위안부’문제를 머리에서도 손에서도 놓지 않았다. 방학이면 사재를 털어 중국, 일본, 싱가포르, 괌, 파푸아뉴기니, 팔라우 등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던 여성들의 자취를 찾아 다녔다. 동시에 각종 문서와 근거자료들을 수집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의 위안부 소집계획이 정부차원에서 치밀하게 준비된 것임을 밝혀냈다. 1941년 조선인 위안부를 2만명 모집하라는 지시가 조선총독부에 내려졌고, 총독부는 단시일 내에 8천여명의 위안부를 모집해 중국 동부로 보냈다는 기록도 찾아냈다. 일본당국과 경찰, 민간업자가 연계된 사업이었다.

 

 

일본 정부에 의해 주도면밀하게 진행된 위안부 사업
일본군에, 조국에, 가족에게 버림받은
소녀들의 몸과 마음


일본제국의 치밀함은 위안부를 단기간에 대량 확보하는데서 그치지 않았다. 생체실험을 통해 한 명의 여성이 군인 27명을 상대할 수 있다는 결과를 얻고, 17세에서 20세 미만의 혼인경험이 없는 소녀들(최근 자료에 의하면 전쟁 말에는 12세 소녀들도 차출됨)을 대상으로 강제 동원했다. 성매매를 하는 직업여성이 안고 있을 성병으로부터 자국의 군인을 보호하기 위해 남자를 모르는 처녀, 그것도 초경을 채 치르기도 전의 소녀까지 포함시켰던 것이다.

직접 만나본 할머니들의 삶은 참혹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전쟁이 끝나고도 돌아오지 못했다. 전쟁 중에는 하루 종일 문이 닳도록 드나들던 일본군들은 패망으로 퇴각하면서는 아무런 고지도 해주지 않았다.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지는 모른 채 한동안 일본군의 발길이 잠잠해진 것이 의아해질 즈음 어디선가 일본이 망했고, 모두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접했다고 한다. 얼마나 그리던 고향인가, 얼마나 가고 싶던 나라인가. 당장이라도 엄마의 품으로, 고향으로 발길을 돌릴 것 같던 그녀들은, 그러나 쉽게 한국행 배에 몸을 싣지 못했다.

“우리 여성들은 여러 번 버림받은 셈이에요. 일본군에게 잡혀 와서 인간다움을 훼손당해서 몸은 물론이고 인격적인 버림을 받았고, 패망하고서도 일본군이 알려주지 않아 그 나라에 버림 받은 채 남겨졌고, 혹여 돌아가고 싶어 배를 타고서도 집에서 창피해 할까봐, 또 스스로도 수치스러워 삶을 저버린 경우가 많아요. 한 생존자의 친구는 배를 타고 한참을 오다가 누군가 뱃머리에서 ‘부산이 보인다’고 하는 소리에 밖으로 나갔다가 ‘아, 우리 땅이구나, 부산이구나!’ 하고는 잠시 후 그대로 바다에 떨어졌다고 해요. 너무나 그립고 꿈에서도 오고 싶었지만, 집에 가면 가족들에게 누가 될까봐 먼발치서 조선 땅만 눈에 넣고는 실제로 땅은 밟지도 못하고 목숨을 끊은 거지요. 그 심정이 오죽 했겠어요”

 
“전쟁에서 승자는 없어요. 모두 희생자예요.
인간다움을 상실하거나 훼손당한 순간, 살아도 죽은 거지요.”


말을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하고, 목구멍이 묵직하게 차오는 느낌이 들었다. 생존자로 살아남았다고 해도, 그래서 목숨이 붙어있었다고 해서 살아있는 게 아니었다. 인간성을 상실한 일본군인은 일반적인 남녀 간의 사랑을 기대하고 위안소를 찾지 않았다. 그야말로 모든 분노와 무기력을 더 약하고 어린 위안부 소녀들에게 쏟아내었다. 만주에서 만난 박할머니는 변태적 요구를 하는 군인에게 못하겠다고 했다가, 추운 겨울 화로에서 시뻘겋게 닳아오른 부지깽이에 팔이 꿰뚫리고 말았다. 그도 일본의 어느 시골마을에서는 평범한 청년이었을 것이다.

“전쟁에서는 승자가 따로 없어요. 전쟁은 적뿐 아니라 자신(자신의 인간다움)도 살해하는 과정이야. 결국 서로 죽이는 것이지. 목숨이 붙어서 산 것이 아니야. 인간으로서는 다 죽은 셈이지. 살아남은 자도 그 기억을 가지고 있는 한 심리적으로 살해당한 거지요.

일본에서 처음 위안부의 존재를 알렸던 배봉기 할머니도 살아가는 내내 불안해하고, 어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삶을 살았어요. 정상적인 결혼을 해서 잘 살았던 사례는 거의 드물어요. 아예 일제에 의해 임신 능력을 상실한 분들도 있고. 만주 동영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한국말을 잊었더라고. 그러다가 한국말을 쓰는 우리를 보자 말은 못해도 얼마나 우시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말을 잊었겠어요. 위안부 할머니들은 물론이고, 인간다움을 잃은 일본 군인들도 제국주의의 희생자야.”
 
끝내 사과하지 않는 일본정부,
과거는 잊자고 서두르는 한국정부


그 고통의 시간을 살아낸 사람들이 있고, 은폐되고 폐기됐던 서류조각들도 제법 맞추어져서 명백한 자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제대로 인정과 사과를 하지 않았다. 모호한 수사를 쓰며 끝끝내 사과는 피하고 과거는 덮자고 한다. 우리나라 정부와 일부 관료들, 국민들도 과거에 매달리는 일을 건전한 양국의 미래를 발목 잡는 행위라고도 한다. 양국 간 일련의 외교적 행위로 이미 이 문제는 일단락 된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1965년 한일정상회담에서 일본정부는 대한민국 정부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했고, 그 보상의 대가에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함구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1990년 초 윤정옥 교수가 처음으로 신문기고에서 위안부 문제의 근거자료와 실태를 제기한 이래, 일본당국의 진정한 사과를 요구하는 수요집회가 진행되고, 전국에 이를 기리는 소녀상을 세우는 등 국민들의 관심과 지지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2015년 12월에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에게 10억엔의 기금을 제공하는 것을 끝으로 향후의 모든 외교적 협의가 불가역하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용서는 피해의 주체가 가해자에게 하는 것이지, 제3자가 대신하는 게 아니다. 용서는 피해 당사자가 원하는 내용과 방식으로 타당하게 이뤄져야 한다. 10억엔을 받고 상처가 아물 것이라고 생각하는 피해 생존자는 아무도 없었다.
 
역사와 사회공부는 인간의 총체적 정체성 이해의 기초
생명의 존엄을 잃고 버리는 순간,
인간다움도 상실하는 것


윤 선생은 이제 우리 여성만을 피해자로 보지 않는다. 2010년부터 <한국-베트남시민연대>의 회원으로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으로부터 피해를 받은 여성이나 그 후손들에게 생활비와 학자금, 옷 등을 보내고 있다. 얼마 전에는 베트남의 나트랑을 다녀왔다.

마을에는 나무로 된 추모비가 서 있는데 아무 이름도, 글도 없다고 한다. 주민들에게 아무런 글씨가 없는 이유를 물으니 대답이 간단했다. “한 자도 적을 수 없었어요!” 그 날의 고통과 그 끔찍함은 어떤 말로도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벽화에서는 한국군인의 모습이 보였다. 한 마을의 끔찍한 전쟁장면에 한국군 모 부대의 표식이 선명했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여성과 아동은 전쟁의 피해 일선에 있었다. 평범했을 우리의 청년들이 그곳에서는 영혼을 빼앗긴 잔인한 가해자가 되었으리라. 전쟁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정신과 몸을 앗아가는 것이다.

“다시 태어나면, 나는 역사와 사회학을 공부하고 싶어요. 역사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종적으로 통찰해낼 수 있게 해주고, 사회학은 나의 현재를 중심으로 횡적으로 이해하도록 도와주지. 시간적으로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관계성으로는 가족부터 다른 나라 사람들까지 모든 게 연결되어 있어요. 그걸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찾는다면 모든 생명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돼. 산에 있는 나무 한 그루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거예요.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아니야. 지금의 나는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모든 과정을 거쳐 존재하는 거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도 그런 관점에서 시작된 거예요. 나와 ‘함께’ 있던 그 친구들은 어디로 갔을까, 왜 돌아오지 못할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춘천에 내려온 지 6년째. 선생은 자연이 어디에나 가까이 있는 춘천의 고즈넉함이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아파트 뒤쪽의 산책로가 없어지고, 나무가 베어지더니 한가한 찻길도 4차선으로 확장되고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창문 너머 나무가 베어진 자리에 속살을 드러낸 흙길이 선생의 시선에 안타깝게 닿았다. ‘춘천’이 춘천답지 못해지는 것, ‘인간’이 인간답지 못한 것. 그것의 공통점은 ‘생명에 대한 존엄’을 잊는 것이 아닐까. 과거 없는 미래는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 과거를 반성할 때라야 미래가 바로 선다는 것을 윤 선생은 온 생애를 통해 전한다. 함부로 베어진 저 나무들의 빈 자리 위로 세워진 아파트에서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유린당한 소녀들의 삶을 외면한 우리 역사의 토대 위에 세워진 미래는 행복할까. 당신들은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허소영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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