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4월의 그날이 다가온다. 주위를 둘러보면 알 일이지만 자연이 한껏 소생의 기지개를 켜 새로이 피어나는 꽃들로 눈이 부신 이 계절에 수학여행을 가던 단원고 학생 250명이 꽃다운 생명을 물속에서 마감한 그날, 4월 16일이 다시 온다.

세월호에 탑승한 승객은 그나마 나중에 제대로 집계한 바에 따르면 474명으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단원고 학생은 325명이어서 세월호 침몰이 곧 단원고 학생의 사고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사고에서 단원고 학생의 희생은 상징적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그들이 대한민국의 미래, 즉 ‘우리’의 아들, 딸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꾸미지 않아도 꽃보다 예쁘다는 청춘의 그 푸릇푸릇함이 꺾여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가슴 저미는 일이지만 이런 이유만으로 단원고 학생의 희생이 세월호 사건의 상징이 될 수는 없다. 여러 사람이 세월호 사건을 두고 단원고 학생의 희생을 그토록 가슴 아파하다는 이유는 꽃보다 아름다운 이 푸른 ‘우리’의 미래를 ‘우리’가 ‘우리 손’으로 묻어버렸다는 사실 때문이다.

사실 세월호 사건에서 ‘우리’는 공범이다. 그날 학생들에게는 ‘가만히 있으라’ 이야기해 놓고는 자신은 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채 황급히 세월호를 빠져 나온 선장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모습은 바로 ‘우리’의 일상이다. 조금이라도 더 돈을 벌겠다고 규정을 어겨가며 배를 개조하고 배에 실은 화물은 귀찮아 제대로 고박도 하지 않았던 모습 역시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렇게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엄마, 아빠의 안위를 묻는 ‘우리’의 아이들을 수장시켜버렸다.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다.

어쩌다가 ‘우리’가 이런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깊이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반성하지 않는다면 미친 것이다. 사람이 쉬 죽도록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데서 더 나아가 그 덫에 걸려 죽은 자신들의 아이를 보고도 아무 생각이 없다면 미쳤다고 할 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그런데 참 불행하게도 주변을 돌아보면 정말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사고의 재발방지를 위한 단원고 유가족들의 진상규명 노력을 두고 ‘그만하라’, ‘너희 때문에 경제가 흔들린다’ 등의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그런 예다. 자신들과 자신의 아이에게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일까? 그들의 자식도 이 불안전한 사회의 함정에 빠져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인가?

어쩌면 그럴지 모른다. 단원고 학생들의 희생을 보고도 ‘우리’가 어디에 처해 있는지를 보지 못하고 오로지 지금 자기만 무사하면 된다는 식의 사고를 할지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나와 내 아이의 목숨, 그들이 살아갈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해서 이들을 반성의 대열에 합류시켜야 한다. 4월 13일에 치러지는 선거는 이런 일을 하기에 더 없이 좋은 기회다. ‘이제는 그만’, ‘아이는 가슴에 묻는 것’이라며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정치를 청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우리’ 모두 빠짐없이 투표를 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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