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사람 강영희, 함께 아파하고 분노한 세월

2016년 4월 8일 아직은 서늘함이 느껴지는 봄날에 안산을 다녀왔다. 그곳에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가족들을 위한 치유공간 ‘이웃’이 있다. 예전부터 고통 받는 이웃의 삶에 뛰어들어 ‘거리의 의사’라 불리는 정혜신 씨가 세월호 참사 초기부터 희생자 가족을 품고 돌보고 있다.

그곳에서는 때때로 특별한 모임이 열린다. 별이 된 단원고 아이의 생일이면 생일모임이 열리곤 한다. 그 아이를 기억하며 친구와 지인들, ‘이웃 치유자’라고 불리는 마을사람들과 아이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여 한 아이를 알아가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진다. 두 시간을 울고 웃으며 한 아이에게 집중하다 보면 그 아이는 우리 곁에 없지만 모두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아이임을 느낀다. 어제는 나와 특별한 사연이 있는 한 아이의 생일이라 대중교통으로 춘천에서 안산을 갔다가 마지막 전철을 타고 집에 돌아왔다.

2014년 4월 16일, 잔인한 봄날의 기억

2014년 4월 16일의 그 한 주간, 우리는 아이들의 죽음을 생중계로 지켜봤다. 삼풍백화점 사고 당시, 숨죽이며 한 사람씩 살아 돌아올 때마다 온 국민이 환호했던 그런 기억을 떠올리며 우리는 한 아이라도 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긴장의 시간을 보냈다. 그렇지만 결국 ‘구조 0명’의 기록만 남기고 배안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아이들은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다. 차가운 물이 잠긴 배안에서 고통 받고 있을 아이들 생각에 하루가 천년 같던 그 시간들. “해경이 왔대” 하면서 부모들에게 카톡을 보냈던 그 아이들은 폰으로 뉴스를 보며 버림받았다는 것을 알고 하늘로 갔다.나는 전직 중학교 교사다. 다소 이른 나이에 퇴직을 해 수년간 가정에 집중하던 중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뉴스를 보고 SNS로 소식을 읽으면서 많은 이들이 밥을 먹을 수도 없고 눈물만 난다고 했다. 우리 가정도 역시 그랬다. 세월호에서 선장과 선원들은 자기들만 도망쳐 나왔지만, 친구를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 교사와 비정규직 선원도 있었다. 나는 스스로 질문했다.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간 교사라면 어찌했을까? 겁이 많은 나는 아마도 저 먼저 살려고 하지 않았을까? 참 끔찍하다. 내가 그 아이들을 버린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참사 한 달쯤 후, 2014년 5월 15일 진도에 갔다. 경기도 교사들이 ‘단원고 지원단’이라는 이름으로 휴직교사들 중심으로 자율적 봉사를 하고 있었다. 지인을 통해 그들과 함께 팽목을 찾았다. 뉴스에서 본 난민촌 같은 진도체육관, 유가족들이 머물며 고생했던 그곳에서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어떤 교사의 아내 손을 잡고 기도했다. 팽목항에 도착하자마자 주변을 돌아보는데, 네 명의 엄마들이 바다를 향해 외치고 있었다. “○○야, 돌아와, 빨리 나와!” 신기하게도 두 시간 후에 유가족 대기실이라 불리는 천막 보드에 종이 두 장이 붙었다. 누군가 오더니 잠수사가 데려온 두 아이의 성별, 키, 입은 옷, 신발 등을 기록했다. 한 학급에서 돌아오지 못했던 두 아이가 한 달 만에 돌아온 것이었다. 수학여행 갔다가 금요일에는 돌아온다던 아이들이 한 달 만에 싸늘한 몸으로 돌아왔다. 한 달을 진도에 머물며 아이를 애타게 기다려온 엄마들. 살아 돌아온 것도 아닌데 먼저 아이를 찾은 것을 미안해하던 엄마들이 이미 아이 장례를 치룬 상황에서 그 두 엄마를 위로하러 진도로 달려왔다.

“선생님, 이 아이가 우리 아이 맞겠죠? 아니면 더 못 기다리는데…” 몸을 떨면서 물어보는 엄마를 토닥이며 나는 속으로 기도하며 대답했다. “그럼요. 어머니 아이 맞아요. 염려마세요.” 그 말에 고맙다며 웃는 엄마는 밥은 챙겨먹으며 봉사하라고 나를 오히려 챙겨주었다. 바로 그 아이의 생일모임이 어제 안산에서 있었던 것이다.

세월호 참사, 바로 ‘내 사건’이다

진도에 다녀온 후 나는 광화문으로 나갔다. 나를 포함해 세월호 참사의 아픔에 공감하는 여덟 명의 엄마들은 광화문광장에서 돌아가며 매주 하루 한 번 두 시간씩 피켓을 들었다. 그 이후 매일 거리에 나가게 됐지만, 처음엔 그렇게 매주 한 번 낯선 행동을 시작했다.

“아이들이 마지막에 불렀을 이름 엄마, 이제 우리가 답할 때입니다.” 피켓문구를 들고 엄마 맘으로 “세월호, 다 밝히라”며 피켓으로 따져 물었다. 사회문제에 상관없이 각자의 일상을 살던 사람들이 세월호에서 죽어간 아까운 아이들이 바로 내 아이인 것 같아 거리로 나섰다.

두 시간 동안 서있다 보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기도였다. 자식 잃은 부모들을 위해 기도했고,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해, 그리고 진범들을 처벌해주기를 기도하다 보면 훌쩍 두 시간이 지났다. 그렇게 두 달 가량 지열이 올라오고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광장에 서 있다 보니 놀라운 일이 생겼다. 우리가 그 자리에서 서서 기도할 때 우리 기도 속에 있었던 세월호 유가족들이 천막농성을 시작한 것이다. 유민 아버지가 단식한 그 자리, 우리가 그 이전에 서있던 그 자리는 이후 아이들의 분향소로 바뀌기도 했다(지금은 분향소가 그 옆에 마련돼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렇게 의미 깊은 그 자리에 서있었던 것이다.

그 후 여덟 명 엄마들의 피켓모임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점점 확장됐고, 2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면서 참여인원이 줄어들기도 했지만 세월호 진실규명을 위해 꾸준히 전국에서 함께하고 있다. 매주 한 번에서 점점 횟수를 늘리고 장소도 광화문을 비롯해 언론사 앞, 국회 앞, 서초동 대검찰청 앞으로 나가면서 어느 주에는 춘천에서 서울로 매일 피케팅을 나가서 두 시간 서있었다. 그러다보니 다리에도 무리가 오고, 개인적으로 눈물겹게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남모르는 일들도 있었다. 지금은 건강과 가정의 사정으로 활동을 줄이고 매주 한 번만 피켓을 들고 있는데, 다양한 방식으로 잊지 않고 함께 하려고 노력 중이다. 그러다 건강을 추스르고 가정을 챙긴 후에 다시 적극 나서려고 한다. 진실이 밝혀지는 그날까지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24호에 계속)

강영희(53) 씨는 서울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중 춘천사람과 결혼해 춘천시민이 됐다. 서울로 통근하다 일찍이 퇴직해 가정을 돌보던 중 세월호 참사를 접했다. 그 이후 그의 2년은 늘 세월호 가족과 함께한 시간이었다. 세월호 참사를 접한 이후 2년 동안 세월호 가족과 함께 하고 있다. 이 글은 강영희 씨가 겪은 세월호 가족들의 이야기다. 2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강영희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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