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받지 못한 인권, 이웃에 ‘그녀’도 살고 있다

장면 1. TV정규 방송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애국가가 흘러나온다.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풍경이 지나가고,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눈부신 과학발전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하얀 방진복을 입은 사람이 둥근 금속판을 검사하는 모습이 비춰진다. 멋있다.
장면 2. 반도체 메모리 용량이 매년 2배씩 늘어날 것이라는 ‘황의 법칙’이 사실로 증명되던 시절, 고향에서 컴퓨터 기사로 일하던 내게 삼성전자는 한 번쯤 일하고 싶었던 꿈의 직장이었다.
장면 3.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피해 진상을 담은 <먼지 없는 방>과 <사람냄새>를 읽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무수한 전자기계의 완성품 이면에 안전망 없는 노동환경과 노동자 착취가 있었다.

내 생애에서 반도체는 눈부신 과학의 총아였고, 한때 그것을 생산하는 삼성은 꿈의 직장이었으나 지금은 수많은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몬 거대기업의 추악한 전리품으로 압축된다. 그럼에도 내게 삼성반도체 노동자의 피해는 가까운 곳의 일이 아니었다. 춘천에 삼성반도체 피해자 한혜경 씨(사진)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이번호에서는 한혜경씨와 어머니 김시녀씨의 고단하고도 외로운 싸움 이야기를 들어본다. 저 먼 곳이 아닌, 바로 내 이웃의 이야기이다. 한혜경씨와 그 어머니 김시녀씨는 지금 삼성반도체 피해자의 실화를 담은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의 실제 주인공 황상기씨와 함께 삼성 본관에서 200여 일째 농성을 하고 있다. 2014년 삼성이 제시한 배·보상 내역에 대한 문제제기와 잠재적 피해자의 보상 보장을 포함하는 협상안 요구가 농성의 이유다.

혜경씨의 건강상태는 어떤지요?
: 수술 후유증으로 몸을 가누기 어려운 상태에요. 눈까지 복시 판정을 받은 상태고 시력도 점점 나빠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다행히 말투는 어눌해도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어요.

치료를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보상이 시급하겠군요.
: 그렇지요. 당장이라도 멈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몸도 마음도 지쳐있어요. 삼성은 여전히 보상을 축소하고 피해가족의 합의서를 따로 받으면서 배상액을 미끼로 내부갈등을 일으키고 있어요. 견디기 힘들지만 올바른 배상과 더 이상의 피해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조치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계속 싸워야지요.

약자의 싸움이 이기려면 무엇보다 연대가 중요한데, 사실 춘천에 삼성반도체 피해자 가족이 있다는 것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요.
: 혜경이가 수술하고 8년이 지나가고 삼성본관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한 지는 7개월 정도 되어가고 있어요. 그 시간 동안 오로지 두 개의 기억만이 있어요. 삼성과 싸우던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이죠. 춘천에서는 우리 이야기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지는 않아요. 가끔 혜경이와 내가 섬처럼 따로 격리되어 있는 느낌도 들어요.

보상과 관련해서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 2001년 10월에 혜경이가 수술을 하고, 작년까지 참 활기차게 활동을 해왔는데, 올 해 들어오면서 많이 지쳐가는 것 같아요. 2012년 쯤 삼성 측에서 따로 찾아온 적이 있어요. 10억을 보상해 줄 테니 다른 단체나 어떤 사람과 만나지 말아달라는 조건이었죠. 저나 제 주변 사람들은 혜경이를 위해서는 보상금을 받아서 당장이라도 좋은 환경에서 치료도 받고 편하게 지내게 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혜경인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했어요.

혜경씨는 왜 그토록 단호하게 거절했지요?
한혜경 : 제가 뇌종양이 생기고 지금까지 반올림에서 참 많이 도와 주셨어요. 몸이 불편한 저를 위해 힘을 써주고 있는 그 사람들을 배신할 수 없었어요. 나만 편하고 잘 되면 안 된다고 그때 생각했어요.

: 혜경이에게 반올림 활동가들은 가족이죠. 몸 불편한 혜경이 데리고 강릉으로, 제주도로 여행을 같이 가주기도 했어요. 반올림 활동가들에 대한 믿음과 의리도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때 그 돈을 받지 않고 지금까지 함께 견뎌온 덕에 삼성 반도체 산업 환경이 그나마 알려졌고, 혜경이 같은 질병을 얻게 된 이들도 우리보다는 보상을 쉽게 받게 되었다고 봐요.

모든 문제가 해결 되었을 때는 어떠실 것 같으세요?
: 글쎄요. 시원섭섭하려나?(웃음) 우선 혜경이 건강과 재활에 집중을 할 것 같네요. 그리고 우리 혜경이가 좀 든든해지면 저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장으로 연대하기 위해 다닐 것 같아요. 제가 받았던 도움도 돌려 드리고, 외롭게 싸우는 사람들에게 혼자가 아니며, 같이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요. 힘든 싸움을 해 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 둘은 너무 잘 아니까요.

삼성과 보상협의가 늦어지는 게 결국 보상금을 더 받으려는 욕심 때문이 아니냐는 시선도 있는 것 같습니다.
김 :그런 말 많이 듣죠!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삼성이 과오를 제대로 인정하고, 그에 따른 진심어린 사과와 정당한 배상입니다. 3월 4일 유미(황상기씨의 딸) 추모제 때 세월호 유가족 합창단이 오셔서 노래하는 내내 우시더라고요. 자식의 죽음도 억울한데 자식 팔아 돈벌이한다는 비난을 듣는 심정이 어떻겠어요. 결국 진실과 상식을 요구하는 우리가 이상한 사람이 되었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어요. 아직 가야할 길이 있으니까요.

당신의 자녀가 잘못했을 때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사탕 몇 개 쥐어주고 상대 아이에게 잊어버리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아예 잡아떼며 피해를 입은 그의 무능을 비난할 텐가? 내가 배운 ‘사과’는 그렇지 않다. 먼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인지하고 인정하는 것, 그리고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과 방식대로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게 상식이다. 세월호 유가족들도, 위안부할머니들도, 삼성전자반도체공장 피해자들도 다만 상식을 바랄 뿐이다. 그 상식이 통하지 않아서 이들은 모두 거리로 나선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들이 거리에서 외롭게 지쳐가지 않도록 연대하는 일이다. 기억하고 마음과 몸을 보태는 일이다. 혜경씨의 어머니 말씀처럼, 자신의 딸의 일이 해결되었어도 다른 이의 억울한 일에 같이 힘을 모아주겠다는 다짐처럼. 함께 하는 일이다. 아, 그럼에도 4월의 대한민국은 내내 눈물겹다.

강종윤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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