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새로운 ‘민기(民氣)’를 느낀다.” 지난 2월 초, 어느 모임에서 언론계 원로선배께서 한 말이다. 3년째 악정을 되풀이해온 정부여당과, 제 몫을 감당 못하는 야당에 대한 절망적 비평 끝에 나온 얘기였다. 그분은 3·1운동과 4·19혁명 전에도 비슷한 말이 나돌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민기’는 현실의 고통을 가장 밑바닥에서 받아내는 많은 사람들이 특정한 시기에 갖게 되는 마음상태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후 현실정치에서는 야당이 두 개로 쪼개지고, 어설픈 희망마저 사라지는 듯했다. 총선국면이 시작되자 미디어는 너나 할 것 없이 여론조사와 전문가들의 분석을 곁들여 여당의 압승을 예상했다. 일여다야 국면에서 누가 봐도 맞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들은 매번 10% 안팎의 응답률을 보인 여론조사 결과를 온갖 경우의 수와 통계학의 옷을 입혀 확증적으로 설명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민기(民氣)는 수치화 할 수 있는 여론으로 잡히지 않았다.

민기는 절망적인 현실의 벽에 맺혀있는 꽃봉오리와 같다. 세속정치가 공동체의 숙제를 풀어내지 못할 때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피어난다. 4·13 선거에서처럼 견디고 견디다 타락한 현실정치에 경고를 내리면서 모습을 드러낼 뿐 평소엔 존재감이 없다. 총선 뒤 두 야당은 서로 자신의 승리라고 자랑질이다. 하지만 승자는 따로 있다. 기존의 모든 정치세력에게 패배판정을 내리는 동시에 새 과제를 내주며 활짝 민기를 꽃피운 유권자들이다. 정치권의 혁신이 4·13 민기 분출의 속내를 성찰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는 이유다.

백성 ‘민(民)’자는 파자하면, 사람의 눈을 대나무 꼬챙이로 찔러 멀게 한 데서 온 상형문자라고 한다. 이 형벌을 받은 사람은 주로 노예제시대의 전쟁포로였다. 당시 전쟁에 끌려온 이들은 대부분 노예들이었다. 전쟁에서 이긴 쪽이 대나무 꼬챙이로 포로가 된 적국 전사의 한 쪽 눈을 못 쓰게 한 데서 백성 ‘민’ 자가 탄생한 셈이다. 두 눈을 멀게 하면 그만큼 노동력 상실로 이어진다. 한 쪽만 기능을 잃게 한 이유다. 당시에 가장 치명적인 무기는 활이었다. 외눈으로는 정확한 겨냥이 불가능하다. 처음에는 노동력 확보 차원에서라도 눈을 멀게 하지 않았을 테다. 하지만 탈출과 반발이 잦아지자 이런 가혹한 형벌을 생각해 냈을 것이다.

그런데도 권력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막지 못했다. 노예들은 자유와 권리를 위한 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스파르타쿠스와 만적이 그랬다. 환경이 조금 달라졌지만 토마스 뮌쩌나 헤리엇 터브먼, 전봉준은 목숨을 던져 당대의 억압적인 질서에 맞섰다. 인류는 싸우고 희생한 만큼만 자유와 권리를 쟁취했다. 그러다 겨우 19세기에 와서야, 그것도 일부 국가 시민들만 투표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소프트 파워’를 갖기에 이르렀다. 한국 역시 지난 1987년 예상치 못한 ‘민기’ 분출을 통해 대통령 선거권을 다시 찾았다. 겨우 30 년 전 일이다.

고광헌(시인 한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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