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뜨기 전, 푸른 빛 도는 새벽 호숫가, 보트 위 낚시하는 뒷모습의 여인. 영화 julia(1977)는 그 여인의 독백, ‘오래된 그림은 시간이 갈수록 투명해진다. 그렇게 되면 그림들은 밑그림을 보인다. 이것을 펜티멘토라고 한다…’로 시작해서 같은 장면으로 피드백 돼 독백, ‘나는 끈질기다. 아직도 그 둘(친구 줄리아와 남편)을 잊지 못하니까…’로 마무리된다.
눈을 감고 생각해보자, 정신없이 쳇바퀴 돌 듯하던 일상이 문득 벗겨지며 가슴 저 밑바닥에 밑그림으로 깔려있던 일이며 사람이 스멀스멀 떠올라, 순간 그리움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일은 없는지…
작가 릴리언 헬먼의 자전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1930년대 질풍의 시대, 살아남은 친구 릴리(제인 폰다 분)와 시대에 희생돼 젊은 시절 앞서 간 친구 줄리아(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사이의 강렬한 우정을 그린 것이다.

어릴 적부터의 절친, 줄리아와 릴리는 고교졸업 후 진로가 각자 달라진다. 부유한 집안의 줄리아는 옥스퍼드 의대로 진학하고, 릴리는 작가가 될 것을 꿈꾼다. 이후 줄리아는 나치즘과 파시즘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하고 곧 쫓기는 신분이 된다. 유명작가와 결혼도 하고 본인도 소설가로 성공적 데뷔를 한 릴리는 줄리아를 만나러 파리 행을 하지만 투쟁과정에서 반죽음이 된 줄리아와 짧은 해후를 할 뿐, 릴리가 병원을 다시 찾았을 때 줄리아는 조직에 의해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미국으로 돌아온 릴리에게 비밀조직이 접근해 5만불의 자금을 가지고 베를린으로 오라는 줄리아의 부탁을 전한다. 삼엄한 경비망을 피해 베를린역 근처 작은 까페를 찾은 릴리. 카페 한 구석에 한 다리가 잘려 의족을 한 채 한편으론 반갑고 한편으론 불안하지만, 침착한 표정으로 릴리를 맞는 줄리아.

언제 경찰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긴박한 순간, 릴리에게 쏟아 붓는 줄리아의 그 응축된 시선과 표정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많은 것을 담은 커다란 눈, 바네사 그레이브의 모든 매력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반가움도 잠시, 곧 감시자가 들이닥치고 침착하게 5만불을 빼돌린 줄리아는 릴리에게 한 살짜리 딸이 있음을 밝히며 그 딸의 장래를 부탁한다. 10여분 간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미국으로 돌아온 릴리는 곧 줄리아가 살해됐다는 비밀쪽지를 받게 된다. 미친 듯이 줄리아의 시신을 찾아 헤매는 릴리… 그러나 줄리아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줄리아의 딸을 찾고자 알자스 근방의 모든 빵집을 뒤지지만 찾지 못한다. 정체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는 조직원들의 분위기를 보고 릴리는 줄리아가 조직에 철저히 이용당했음을 알게 된다. 도움을 얻고자 명문가 줄리아의 집을 찾은 릴리에게 집사는 차갑게 얘기한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모릅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줄리아가 사회주의자가 돼 모든 재산을 다 날렸다는 소문이 돌고… 이념을 위해, 사회변혁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건만 가족과 친구들과 동지들에게서 철저히 잊히고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줄리아. 아이마저 죽음을 당했으리라는 암시 속에 부러울 것 없는 부유한 명문가에 태어나 모든 것을 버렸건만 철저히 이용당하고 잊혀야 하는 줄리아의 죽음에 릴리는 오열한다.

과연 줄리아가 목숨 바쳐 지킨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념은 무엇이며, 그것은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거침없이 모든 것을 내던진 줄리아의 삶은 어떻게 평가받아야 하는가? 살아남은 자의 몫은 무엇일까?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도록 몇 가지 질문이 머리를 맴돌게 한다.

이경순 (춘천여성민우회 운영위원)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