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할 무렵 도착한 진도 팽목항엔 비가 뿌렸다. 차마 한달음에 달려오지 못하고 2년이 지나서야 이곳을 찾은 무거운 마음을 비구름이 쓸어내리는 듯했다. 기억의 벽을 따라, 기다림의 의자를 지나, 노란리본이 달린 등대 아래 하늘나라우체통까지… 아직도 미수습된 아홉 명의 얼굴과 인양되지 않은 진실의 이름을 새기며 비바람 속 방파제를 거닐었다. 잃어버린 스승의 시대, 유가족 대표와 세월호 3년상을 치루는 광주시민상주 분들과 하룻밤을 보내며 이 분들이야말로 실천하는 이 땅의 스승들임을 깨우쳤다. 푸른 오월의 신록에 세월호의 노란리본이 더욱 도드라져 샛노랗게 기억되는 가정의 달과 교육주간에 진정한 스승에 대해 어김없이 떠오르는 책이 있다.

《지로이야기》(시모무라 고진 저, 김욱 옮김, 양철북)을 만난 건 7년 전이다. 작가가 5부작으로 구성했던 책이 국내에는 3권의 장편소설로 소개되었다. 처음 이 책을 구해 밤새워 읽으며 느꼈던 설렘과 감동을 동료 교사들과 나누고 싶어, 해마다 5월이면 함께 읽는 도서로 꾸준히 소개해 왔다.

이 책은 어린 지로가 태어나 유·소년기를 거쳐 당당한 청년으로 자기 세계를 개척하며 한 인격체로 커나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의 고전이다. 유년시절부터 사춘기, 학창시절을 거쳐 청년교육기관에 몸담으며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까지 한 인간의 생각과 마음의 여정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주인공 지로를 중심으로 날줄과 씨줄로 얽힌 갖가지 사건과 인간관계는 고스란히 작품의 시대배경인 1920년~1930년대의 역사이자 사회이다. 지로는 가족, 친구, 학교, 국가와 사랑하고 싸우고 화해하며 살아간다. 그의 마음은 행복으로 충만했다가 황무지가 되어 버리곤 한다. 지로는 바로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었으며, 시대의 자화상이었고, 청년들의 자화상이었다. 또한 지로는 시대와 공간이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70여 년 전에 쓰인 소설이 전혀 예스럽지 않고 오늘, 여기의 이야기로 읽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교단의 삶을 사는 교사들에게 스승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책으로 널리 권장하고 싶다. 더불어 아이를 키우는 모든 부모들께 함께 읽기를 권한다. 특히 지로의 스승 아사쿠라와 아버지 슌스케, 유모 오하마, 할아버지와 할머니까지, 그들의 가르침이 주는 깊은 울림은 여느 책에서 얻을 수 없는 값진 깨달음이다. 그저 온 마음을 다해 사랑을 준 유모, 자신의 신념을 꿋꿋하게 실천하며 살아가는 힘을 가르쳐준 아버지, 그리고 아사쿠라 선생님은 스스로 계획하고 실행하는 힘,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삶, 농촌공동체를 바탕으로 일하는 삶을 실천하도록 가르침을 준다. 배움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지로에게는 삶의 길목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 스승이었다.

《지로 이야기》는 작가가 인생을 웅숭깊은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시점인 52세부터 70세까지 20여 년에 걸쳐 쓴 필생의 역작이다. 이는 작품에 녹아 있는 인생에 대한 깊은 진실과 통찰이 관통하고 있는 힘에서 느낄 수 있다. 책 속 주인공 지로는 작가의 분신이며 책을 읽는 독자 자신이다. 푸른 5월, 가정의 달과 교육주간에 책 속 지로의 훌륭한 스승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한 스승의 역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하며 오래도록 잔잔한 울림을 줄 것이다.

 

 

한명숙 (인제중 수석교사)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