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경찰기록 정정…충혼탑 전사자 명단은 아직도 그대로

1950년 6월 25일 인민군이 춘천으로 남하하기에 가장 좋은 통로였던 모진교를 장악했다. 모진교가 왜 폭파되지 않고 고스란히 인민군에게 장악됐는지는 후일까지도 논란이 많았다. 당시 북한 2군단 공병부부장이었던 주영복은 모진교 점령 직후 당시 북한 2군단 지휘부가 보고를 받고 “모진교를 정말 점령했느냐, 그것이 폭파되지 않고 남아 있었느냐”고 반문했다고 증언했을 정도로 모진교는 전락적 요충지였다.

모진교 전투는 한국전쟁 전사에서 국군이 초기 전투에서 유일하게 승리한 것으로 기록된 춘천대첩의 시작을 알리는 전투였다. 모진교는 현재의 사북면 원평리와 인람리를 연결해주던 교량으로 1938년 개설된 폭 4m, 길이 250m의 교량이다. 1963년까지 이용됐으나 지금은 춘천호 담수로 물속에 잠겨있다.

당시 윤홍규 경사를 비롯한 사북파출소 경찰들은 인민군의 동태를 파악하라는 지시를 받고 모진교를 지키고 있다가 후퇴하지 못하고 밀고자에 의해 인민군에게 체포됐다. 인민군은 이들을 모진강 강변에 세워놓고 무차별 난사를 했다. 그러나 윤 경사는 양쪽 허벅지 관통상을 입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신북의 한 농가로 피신해 목숨을 구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윤 경사는 피난을 가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경찰에 복귀해 계속 경찰관으로 근무하다 전쟁이 끝난 후에 퇴임 후 1961년 12월 지병으로 사망했다. 강원경찰 기록에는 윤 경사가 1948년~1949년쯤 경찰시험에 합격하여 복무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경찰기록과 서면의 충혼탑에는 윤 경사가 사북파출소에서 전사했고 계급은 경사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버젓이 살아 있는 사람을 전사한 사람으로 기록한 것이다. 윤 경사의 아들 윤종우 씨가 이를 바로 잡기 위해 기록을 찾고, 정부에 민원도 제기하고, 강원경찰에도 전사자 명단에서 빼줄 것과 충혼탑의 전사자 명단에서도 삭제해 줄 것을 요구했다. 윤씨의 수년간의 노력으로 강원경찰청은 2002년 ‘경무63100-2862’ 문서를 통해 경찰기록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윤 경사의 기록을 전사자에서 양쪽 허벅지 관통상으로 인한 전상경찰관으로 바로잡았음을 통보했다. 그러나 경찰 충혼탑의 전사자 이름에서는 삭제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윤 씨는 잘못된 기록으로 등재된 전사자 이름을 삭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강원경찰청이 2002년에 기록을 정정하였음을 통보하고도 충혼탑에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과 보훈 대상자로 등재가 가능한지 여부 등에 후속절차를 진행하지 않은 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66년 전인 1950년에 있었던 이 일은 윤 경사의 아들인 윤씨가 지난해 6월 말경 (사)춘천역사문화연구회 홈페이지에 이런 내용을 제보하면서 뒤늦게 알려졌다. 이후 춘천역사문화연구회는 제보자 윤 씨를 만나 기록을 확인하고 현장을 방문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전문가들에 따르면 충혼탑의 명단을 삭제하는 것이 어렵다는 경찰측 주장이 설득력이 없다고 지적한다. 석탑과 금석문 관련 전문가에게 탑의 형태를 설명하고 사진을 보여주며 삭제가 가능하냐고 묻자 글자가 음각이라 글자를 삭제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춘천사람들>의 취재가 진행되자 강원경찰청 경무과 담당자는 이런 내용을 잘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2002년에 통보가 진행됐지만 그 후 기록정리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는 대목이다. 담당자인 이모 경사는 충혼탑의 전사자 명단에서 삭제하는 것은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며, 상부에도 보고를 했고 빠른 시일에 바로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기록 확인 등 절차를 진행해 윤 경사의 후손이 보훈절차를 진행할 수 있는지 여부를 검토하고 통보해주겠다고 말했다.

살아 있어도 전사자로 남아 그에 따른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던 윤 경사의 아들 윤종우 씨는 부친의 명예와 관련해 이제라도 기록이 바로 잡히고 충혼탑의 명단에서도 삭제되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기록의 중요성은 백 번을 지적해도 부족하지 않다. 하물며 춘천대첩 최초 전투의 기록을 바로잡고 전투에서 희생된 인물들의 정확한 전공과 후속대책을 제대로 진행하는 것은 춘천대첩의 선양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 춘천대첩을 포함해 한국전쟁과 관련해 꽤 많은 부분이 조명되고 있지만 경찰관련 기록의 정리와 선양사업은 아직도 미진하다는 지적이 많다. 전쟁초기 12명의 경찰관과 대한청년단원 3명 등 15명으로 사단병력에 맞서 한 시간 이상 적군의 발을 묶어 춘천대첩의 기틀을 만든 노종해 경감을 비롯한 내평파출소 경찰관들의 선양사업도 2015년에야 빛을 보았다. 경찰관들조차도 잘 알지 못하는 모진교 전투의 정확한 실상을 기록으로 남기고 선양해나가는 일은 강원경찰의 위상을 높이는데도 필요한 일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 달여 후면 한국전쟁 66돌이다. 한국전쟁 당시 춘천은 춘천대첩이라고 전사(戰史)에 기록될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현장이었다. 춘천전투에서 수많은 이름 없는 장병들과 경찰관, 시민, 근로자 등이 전쟁의 희생양이 됐다. 뼈아픈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는 일은 현재의 우리들이 해야 할 몫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객관적인 전사의 기록은 중요하다.

오동철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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