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당시 강원대 학생운동의 주역 최윤에게 듣다

1980년 5월 18일 0시. 전두환 등 신군부는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신군부에 반대한 재야인사들과 학생들을 무더기로 체포했다. 춘천에서도 교수 3명을 포함 100여명의 학생들이 당시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했다. 한 달에 걸쳐 물고문과 전기고문에 ‘서로 때리기’ 등으로 온몸이 새카맣게 변했다. 이 중 교수 1명을 포함 17명이 구속됐다. 당시 강원대 시위를 주도했던 최윤(59·당시 영어교육과 2년) 강원살림 이사장을 만나 1980년을 전후한 춘천의 민주화운동을 들어봤다.

 

 

우선 5·18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상세히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10·26사태 이후 1980년 봄까지 전국적으로 계엄령 해제,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어요. 춘천에서는 강원대가 시위를 주도했죠. 거의 매일 시위를 하다시피 했는데 많을 때는 2~3천명이 시위에 참가했어요. 당시 전교생이 4천명이었으니 거의 대부분이 참가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죠. 4월 19일에는 계엄 하에서 전국 최초의 가두시위를 전개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는 이런 국민들의 요구를 수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요. 특히 5월 15일에 있었던 서울역 집회는 10만명이 넘는 대규모 시위였는데, 아마도 신군부는 더 이상 방치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오히려 계엄령을 확대하고 저항세력을 모조리 잡아들이는 초강수를 선택한 거죠. 5월 18일 이후 전국적으로 주요 인물들이 대거 검거되고 소강상태에 들어갔는데, 광주에서만 항쟁이 지속된 거죠. 군 병력이 광주로 집중되면서 광주는 고립된 섬처럼 외로운 항쟁을 하게 된 거고, 결국 10여일 만에 처절한 희생을 치루고 진압되고 말았죠.

강원대에서 시위를 이끌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나요?

강원대에서는 1980년 3월에 민중문화연구회(회장 성낙철·당시 농화학과 4년)라는 서클이 만들어졌는데, 회원이 약 200명 정도 됐어요. 그 중 100여명이 연행된 거죠. 5월 17일 당시 집에서 TV를 보는데 밤 12시에 계엄령을 확대한다는 자막을 보게 됐어요. 그때 지금의 도청 옆이 집이었는데, 옆집에 도경찰청에 근무하는 경찰이 살았어요. 상황을 알아보려고 그 집에 갔더니 빨리 피하라는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30분쯤 돼서 경찰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치더군요. 설마 경찰이 사는 집에 숨었을 거란 생각은 못했겠지요. 그 경찰은 이후 심리적 스트레스로 신경쇠약에 걸렸다고 들었어요. 지금은 사망했는데 아직도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그 다음날부터는 후평1단지에 사는 아버지 친구 집으로 피신해 숨어 지냈어요. 수배가 내려졌는데 잡으면 1계급 특진에 현상금이 50만원이었으니 경찰들이 불을 켜고 나를 찾았지요. 그런데 계엄사에서 둘째 형을 잡아갔어요. 둘째 형 사무실을 도청하고 있었던 거지요. 둘째 형을 풀어줄테니 자수하라는 겁니다. 결국 내 발로 찾아가고 말았죠. 당시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갔는데 이미 100여명이 잡혀와 있더군요. 헌병들이 군화발로 마구 짓밟았어요. 한 달 내내 그렇게 당하고 17명이 구속돼 군사재판을 받았죠. 20여명은 군대에 강제로 징집돼 2주 정도 또 혹독하게 시달렸고… 나중에 보니 서울대와 고려대 다음으로 구속자가 많았더군요

 

 

그때 구속된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지요?

구속자는 모두 17명인데, 박판영 교수를 포함해 9명은 선고유예나 집행유예로 풀려났어요. 나머지 8명 중 나와 이병길 선배가 3년, 허인규·김천안·김상호·이동섭은 2년, 백진숙과 성낙철이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아 2심 재판을 받게 됐죠. 2심에서 백진숙과 성낙철은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나머지 6명은 모두 기각돼 복역을 하게 됐는데, 1년쯤 지나 나를 제외한 5명도 모두 가석방으로 풀려났어요.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면 굉장히 고통스럽기도 하겠지만 여러 가지 일화도 있었을 텐데 특별히 말씀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보안대 지하실에서 한 달간을 맞으며 지내다보니 나중에는 헌병들과도 친해졌어요. 그래서 안티프라민을 부탁했죠. 온몸에 안티프라민을 바르는데, 박판영(당시 39세·경영학과) 교수가 남았으면 자기도 달라고 하더군요. 나는 그때까지 교수는 안 맞았겠지 했는데, 그 분도 온몸이 새카맣게 멍이 들었더군요. 박판영 교수와 함께 문선재(교육학과)·유병석(국어교육과) 교수도 잡혀왔는데, 두 사람은 훈방이 되고 박판영 교수만 구속됐다 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어요.

강원대에서 그렇게 대규모의 시위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데요? 그 배경은 무엇이었는지요?

이미 10·26사태 이전인 1979년 9월 3일에 강원대에서 전국 최초로 긴급조치 철폐 시위가 있었어요. 당시 강원대 천지관 학생식당에서 약 800명 정도가 모여 있었는데, 다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하는 눈치였어요. 동조하기도 어렵고 외면하기도 어려운… 곧바로 경찰과 학생과 직원들에 의해 제압돼 질질 끌려갔는데, 아마도 다른 학생들이 그때 그 사건에 대해 부채의식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마침 80년 봄 전국적인 저항의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강원대에서도 잠재적인 저항의식이 터져 나온 걸로 보입니다. 처음에는 어용교수 추방이나 학원자주화, 총학생회 복원 등 학내문제에 대한 요구도 많았어요. 그래서 학도호국단을 총학생회로 바꿀 수 있었지요. 5·18로 몇 달 만에 되돌려지기는 했지만…

사실 긴급조치 치하에서 9월 3일의 강원대 시위는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강원대 시위가 있은 다음날일 4일에 대구 계명대, 5일에 서울대, 7일에 이화여대 시위를 거치며 전국으로 확산됐고, 10월 17일 부산대 시위로 부마항쟁이 촉발된 것이거든요. 결국 10·26으로 귀결되었으니 강원대 시위가 유신체제 종말의 서막을 연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 제2군단 계엄보통군법회의 공소장(1980. 06. 26.)


강원대 학생운동의 전통은 언제부터 이어져 온 것인지요?

1969년에 ‘거멀못’이라는 최초의 학생운동조직이 생겼어요. 지금 생명평화동산 이사장으로 있는 정성헌 선배나 큰 형인 최열 등이 3선개헌 반대와 교련 반대 등의 시위를 주도했어요. 이때부터 시작된 흐름이 1980년 3월에 민중문화연구회 결성으로 이어졌고, 5·18을 거치며 남아있던 학생들이 1년 뒤인 1981년 4월에 전국 최초의 성조기 소각사건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엄중한 시기에 강원대 학생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됐던 개인적인 동기나 배경이 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유신체제는 정치적 자유뿐만 아니라 생각의 자유까지 허용하지 않았어요. 노래 한 구절과 영화 한 장면까지 통제를 하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았다고 잡아가는 시대였으니까요. 그런 상황을 보며 현실에 대한 저항의식이 깊게 자리했던 것 같아요.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데모를 하기 위해 대학에 가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니까요. 아마도 큰 형(66·최열 환경재단 대표)의 영향력도 있었을 겁니다.(최열 대표는 당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현재 우리가 5·18을 어떤 측면에서 바라봐야 할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5·18 이후 1980년대 내내 광주항쟁은 가장 큰 이슈였어요. 매년 5월이면 광주항쟁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벌어졌죠. 80년 5월 10일간의 광주는 민주주의의 수호와 공동체 나눔이라는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범죄도 없고, 서로 음식을 나누고, 심지어는 헌혈로 피도 나누는 그런 정신의 귀감이 되는 역사적 현장이었지요.

지금 우리 사회가 어떻습니까? 양극화가 심각하고, 민주주의는 퇴행을 거듭하고 가고 있습니다. 사회 상황이 이토록 어렵다 보니 5·18 정신이 새롭게 다가오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5·18은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입니다.

36년이면 강산이 세 번이 바뀌고도 남을 만한 시간이다. 그러나 36년 전 우리 선배 세대들이 피 흘려 이룬 민주주의는 피다 만 꽃처럼 시들고 있다. 정치가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재벌 등 소수에 부의 대부분이 집중돼 있다. 권력기구와 고위 관료, 재벌과 언론 등 이 시대의 소위 권력자들은 과거보다 더 교묘하고 강고한 유착관계를 형성하며 절대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아직도 5·18을 교과서 속 과거의 역사로만 기억할 수 없는 이유다.

전흥우 시민기자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