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은 많은 사람들에게 낭만의 도시고, 산과 물이 어우러진 레저도시고, 때로 도시인들의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천연의 휴양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춘천을 둘러싸고 있는 더 많은 공간은 농산촌이다. 10여개의 읍면이 춘천의 밀도 높은 도심을 멀찌감치 아우르며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농사를 생업으로 하며 살고 있는 우리의 또 다른 이웃이 있다. 제대로 쌀 한 톨 만들려면 88번의 손길이 간다고 했던가. 농촌의 삶이 아무리 기계화 되어도 사람의 손이 수없이 오가야 우리 밥상에 오른다. 기계화니 대량생산을 위한 유전자 조작이니 하는 정책의 이면을 보면, 농민의 소득 확대도, 국민들의 삶의 질도 고려되어 있지 않다. 다만, 다국적 자본의 탐욕과 어떤 방식으로든 돈을 벌겠다는 국내 기업의 어리석은 욕망만이 있을 뿐이다. 농촌을 지키고, 시민들의 건강한 삶을 지키기 위해 오랫동안 싸워온 춘천 사람, 춘천 농민 이승렬(61) 전 전농강원도연맹 의장. 현재는 춘천농민회 사북면지회장을 맡고 있다. 그의 삶을 통해 농촌의 현재와 절망, 그럼에도 한 줄 희망을 들여다본다.
2010년 쌀값폭락 대책마련 춘천농민회 기자회견 당시 이승열 전 전농강원도연맹 의장(맨 왼쪽)

이곳 춘천 토박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농사도 어려서부터 지으셨나요?

한국전쟁 당시에 피난오신 아버님께서 어머님과 만나 이 챙벌마을에 정착하셨지. 나도 이곳에서 태어나 줄곧 자랐고. 중학교를 졸업하고선 친구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야간학교 방직과를 다녔어. 거기서 배운 기술로 의류하청업체의 공장에 다니면서 동생들 학비도 대고 고생 많이 했어. 서울시내 다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새벽이면 신문배달도 하고… 일을 찾으려고… 제대로 먹지 못해서 몸이 많이 아팠지만 그땐 겁이 없었거든. 열아홉 땐 무작정 마산으로 내려가서 한일합섬에 취업했는데, 우리나라에서 1억불 탑을 제일 먼저 달성한 곳이지. 노동자가 1만명도 훨씬 넘어. 그때 임금문제로 들고 일어나서 마산 종합운동장으로 모이려고 공장입구를 뚫고 나간 적도 있었지. 그러다 스물넷에 돌아왔어. 고향에 돌아와 뭔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때 내려와 농사를 짓기 시작해서 여동생들 뒷바라지도 하다가 결혼하고 지금껏 이렇게 살고 있는 거야.

그럼 농민운동은 언제부터 시작하게 되셨는지요.
 
음~ 83년도인가, 고려대에서 농활 하러 학생 300명이 들어왔었어. 그때 농활대는 무슨 군대 같았는데, 내 나이가 30세였으니 그 친구들과 형님동생하며 같이 어울렸지. 도시에서 우리를 위해 젊은 친구들이 내려와 일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뭔가 나도 내 삶의 터전인 농촌과 농민 문제에 더 의식이 커졌던 거 같아. 바로 84년도에 전두환이 농활을 금지시켜서 그 뒤로부터 흐지부지해졌는데, 나중에 물러나고 나서야 다시 시작된 거고. 본격적으로 운동이라는 것을 한 것은 1985년도에 있었던 ‘소싸움’(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으로 새마을운동본부장이었던 전경환 씨가 병든 수입소를 대량으로 들여온다 하여 일어났던 ‘소파동’) 때였을 거야. 소싸움에 참여하면서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시작했지. 여기 지촌리서도 선배들이 경운기 십 여대에 플랜카드도 써 붙이고, 춘천시내로 나가려고 도로를 달렸어.
그때 경찰이 봉고차로 길 한 복판을 갑자기 막아서는 바람에 맨 앞에서 달리던 경운기가 확 곤두박질친 거야. 우리의 정당한 의지를 꺾으려는 정부와 경찰에 대해 참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 맨몸으로 뛰어들어 싸웠지. 참가자가 전부 연행되었다가 이틀 만에 석방되었어.

80년대 가톨릭농민회에서 지금의 춘천농민회까지 쉬지 않고 지역 농민운동을 함께 해 오셨는데, 크게 기억에 남은 활동들은 어떤 것이었나요?
 
그때 학습도 많이 하고, 매년 수매가투쟁도 활발하게 진행했지. 1987년도 12월 대선 직전에 집에서 광주항쟁 비디오와 사진을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준 적이 있어. 동네사람들은 물론 다른 곳에서도 많이 왔었지. 돼지내장을 잔뜩 가마솥에 넣고 끓여서 대접하기도 하고. 그때 이 행사를 방해하려고 면사무소에서 동네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부역을 시키는 거야. 그런데 밥은 먹어야 하니까 사람들한테 점심식사를 대접한다고 집으로 초대해서는 집안에 전부 광주항쟁 사진을 깔아놓고 비디오도 틀어놨지. 그래서 한창 활동할 때 우리 집을 기관에서 도청하기도 했었고. 한 번은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서울로 투쟁을 가려는데 경찰들이 집집마다 전화를 해서 방해하는 바람에 텅 빈 버스를 타고 혼자 올라간 적도 있었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했지. 그 때는 정말 자신감이 넘쳤어.

보람만큼이나 활동하시면서 힘들었던 순간도 많으셨을 것 같은데요.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어머니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지. 농산물을 새벽시장에 내다팔아서 활동비도 마련해주시고… 농촌과 농민들의 이익을 위해 열심히 활동해서 많은 성과들이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잘 알리지 못한 게 아쉬워. 예전에는 투쟁이 참 많았고, 투쟁하면 나름 성과도 있었는데, 이명박 정권부터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벌금을 물리니까.
지금 농촌에 사람이 없는 게 제일 큰 문제야, 40대 젊은 농민들은 일밖에 몰라. 농촌지역,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나 노력이 없어. 함께 사는 세상이 아니야.
교육이나 의료만이라도 충분히 보장되면 농민들 살 수 있거든. 시설지원 한답시고 농민들 빚쟁이로 만들면서 쓸 데 없는데 돈 쓰지 말고, 기본적인 생활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월급을 줘야 돼. 그리고 홀로 사시는 어르신들이 참 많은 데 그 분들도 정말 걱정이다…

최근에는 유전자조작 벼를 개발하고 상용화하겠다는 계획이 나와서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지역 농민들의 입장과 생각은 어떠한가요?
 
오래 전부터 가공식품은 대부분이 수입농산물인데, 이게 거의 다 유전자 조작된 작물이라고 보면 돼. 유전자조작 농산물이 본격적으로 생산된 것은 20여년 전부터인데, 문제는 그게 인체 유해성이나 생태계에 줄 혼란 등에 대해서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는 거지. 암이나 불임 유발 등에 대한 연구결과는 이미 있다고 들었어. 그런데 이번 정부에서는 그런 작물을 아예 우리나라에서 개발하고 실용화 하겠다는 거야. 한 번 시작되면 막기가 어려워. 값싼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수입하거나,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생산하면 제대로 공들여 농사짓는 사람들은 힘들어 질 것이고, 국민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모를 테니 역시 값싼 것을 살 것이고, 그러다가 궁극적으로는 건강을 해치게 되겠지. 모든 것이 불 보듯 뻔한데, 어떻게 반대를 안 하겠어. 그 정점에 있는 게 ‘몬산토’라는 다국적 기업인데, 우리 춘천 농민들도 기자회견도 하고 현수막도 걸어서 ‘전 세계 몬산토 반대의 날’ 행사를 했어. 우리끼리 행사에서만 그치면 안 되는 데, 많이 안타깝지…

40여년 가까이 농부로, 그 가운데 30여년은 농민운동가로 살아온 이승렬 전 의장을 만나러 가는 길은, ‘저 푸른 초원의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사는’ 아름다운 상상으로 가붓하고 즐거운 마음이었는데, 나오는 길은 몇 배나 길고 무거웠다. 자취하는 청년의 밥상을 걱정하며 한 아름 싸주신 반찬마저 눈물겹게 느껴졌다. 어쩌면 나의 아이들은 이렇게 자연의 맛이 그대로 담겨 있는 나물이며, 밥을 먹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염려와 슬픔이 몰려왔다. 농사를 지을수록 빚인 세상, 그런 빚을 안고도 오늘도 새벽 농사일을 위해 잠을 설치는 사람들… 이 땅의 농부들은 매일, 스스로는 절망을 먹으면서 희망의 씨앗을 심는 사람이다. 유전자조작(GM) 농산물을 막는 것, 토종 종자를 없애고 자신들의 특허 품종으로 세계를 장악한 몬산토를 거부하는 일, 번거롭더라도 지역 농산물을 제값주고 사먹는 일… 이 모든 것은 농민들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것을 먹는 최종 소비자인 우리 시민들 자신을 위한 것이며, 우리가 키우는 아이들의 안전과 건강을 위한 것이다. 그러려면 농업이 지속가능한 일터와 생산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도망치듯 나온 그 농촌이 어둠에 사위어 갈 동안 도시는 빛으로 환하다. 농민들이 진 ‘빚’이 도시의 ‘빛’이 되는 것은 아닌지,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승렬 전 의장은 지금 사북면에서 한우를 기르고 있다.

김병혁 시민기자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