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학자와 시인의 두 길 인생,
허문영 시인

한국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는 1954년의 서울 뚝섬은 남새(채소)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주로 사는 시골마을이었다. 모랫벌이 드넓게 펼쳐진 강변은 가난한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그 섬에서 나는 채소들은 성수동, 왕십리 등으로 팔려나갔다.

뚝섬에서 태어난 허문영 시인은 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워온 문학 소년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문학써클에서 활동하며 성균관대에서 개최하는 백일장에 참가해 당선되기도 했다. 문학이 꿈이었던 소년은 의지와는 달리 약학대에 진학하게 된다. 가난한 시골마을의 머리 좋은 아이에게 문학을 권장할 부모가 어디에 있을까? 그렇게 허문영 시인은 중앙대 약학과를 들어갔다. 약대에 들어갔지만 약학공부는 하지 않고 문학써클에 가입해 써클활동을 했다. 대학생활 내내 문학활동을 하다 보니 공부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야 정신을 차리고 공부해 졸업할 수 있었다.

허 시인은 군대에 입대하면서 춘천과 인연을 맺고 약학자이자 시인으로서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다. 군 입대 후 배치된 곳은 우두동에 자리한 제2 공병여단. 당시 보직은 위생병이었다. 허문영 시인이 배치된 공병여단은 허 시인보다 2년 앞서 정호승 시인이 있었고, 조성기 소설가가 복무했던 부대였다. 이런 인연으로 시인의 마음속에 잠자던 문학의 꿈이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춘천이 너무 좋았다. 안개가 자욱한 의암호가 좋았고, 푸른 산과 계곡이 어우러진 자연 환경이 좋았다. 그렇게 춘천에 자리를 잡았다. 서울로 가면 제약회사에 취업을 할 텐데 춘천에 살던 친구의 약국을 인수 받았다. 약사였던 아내가 약국을 운영하고 시인은 당시 중앙로에 있던 강원보건환경연구원에 들어갔다. 안정이 되자 중앙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석·박사 과정을 마칠 무렵인 1982년 강원대에 약학대학이 신설되면서 조교로 들어갔고, 강사를 거쳐 교수가 됐다. 환경위생학을 전공한 이유이기도 했지만, 시인이 관심을 가진 분야는 환경과 위생, 치유 등 인간 환경과 관계가 깊었다. 그런 이유가 시인의 길을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의학은 부인이고, 문학은 애인

춘천에 자리를 잡으면서부터 다시 문학의 꿈을 찾고 지역문단과의 조우를 통해 당시 수향시 낭송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몇 년간 낭송회 활동을 하며 실력을 키워 마침내 1989년 ‘시대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등단 이후에는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약대 교수와 시인의 길을 걷는 특이한 이력에 대해 스스로 러시아의 소설가이며 의학자인 안톤체호프의 ‘의학은 부인이고, 문학은 애인이다’라는 말을 자주 인용한다.

시인은 약학과 문학에 공통분모가 있고 상호 보완적이라고 말한다. 약학은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는 의학이고, 문학은 영혼의 병을 치유하는 의학이라는 설명이다. 육체의 질병은 치료가 가능하지만, 영혼의 질병은 약으로 치료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영혼의 질병을 치료하는 시를 쓰고 싶었고, 그동안 6편의 시집과 1편의 산문집을 발표했다. 약학자와 시인이라는 특이한 이력은 《왕버들나무 고아원》이라는 다섯 번째 시집에 녹아있다. 《왕버들나무 고아원》의 부제는 비타민 시집이다. 시인은 왕버들나무 고아원을 통해 자연생태적인 측면에서 인간이 살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왕버들나무 고아원》은 고목의 몸통에 붙어사는 산벚나무, 쥐똥나무, 산사나무 등 여덟 종류의 나무들이 붙어사는 청주의 한 나무를 소재로 공동체로서 살아가야할 이야기를 담고 있다.

네 번째로 출간했던 시집은 서간시집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좋아하는 여인에게 써 왔던 편지를 모아 책을 펴냈다. 유자효 시인은 독특한 장르의 시로 전국의 88명을 선정했는데, 그 중 한 명으로 허 시인의 이 시집을 소개했다. 2006년에는 강원도와 춘천의 이야기를 엮은 산문집도 출간했다.

지난해에는 그동안 약학전문지에 72회 동안 연재했던 음악 24편, 문학 24편, 미술 24편 등 72편의 고전을 약학과 관계 지어 《PHARMacy IN ART》(예술속의 약학)를 출간했다. 이 책은 약학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인문학과 예술을 알게 하자는 의미로 출간하게 됐다. 인성이 따라주지 않는 전문가의 양산을 막기 위해서다. 약대 학생들에게는 약을 통해 예술을 알게 하고 일반인들에게는 예술을 통해 약을 알게 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춘천의 색깔과 이미지를 지켜야 한다

시인에게 춘천은 어떤 곳일까? 시인은 춘천이 문학을 하는데 더 없이 좋은 공간이라고 한다. 춘천의 조용하고 정적인 이미지가 작품활동을 하기에 좋다고 한다. 그러나 아쉬움도 있다. 너무 개발 위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개발로 인한 생태파괴가 너무 심해 이사를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살아내야 하고,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에 언론기고를 통해 춘천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춘천 제대로 가고 있는가’, ‘춘천의 블렌딩과 브랜드’ 등 시사적인 글을 많이 썼다. 춘천이 근래 관광과 놀이시설 등 유흥문화에 너무 치우쳐 있다며, “춘천은 역사와 전통문화, 예술을 초점으로 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시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20대의 젊은이가 왜 그토록 춘천을 좋아했고, 춘천에서 자리를 잡으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 애정이 있었기에 20대의 젊은이가 60이 넘도록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가기 위해 지키겠다는 마음을 내비치는 것이리라. 예술인들은 한결같이 춘천만의 색깔이 있다는 말을 하곤 한다. 많은 이들이 느끼는 춘천의 색깔은 분명 정적이고 조용한 이미지일 것이다. 그런 이미지가 사라져 춘천이 고유의 색과 정체성을 잃어버린 도시가 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두렵기까지 하다. 레고랜드, 캠프페이지, 고슴도치섬, 붕어섬, 사라지는 근대문화 유산들과 춘천시 청사…. 시인에게서 하나둘 없어지는 춘천의 자산과 이미지에 대한 안타까움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허문영 시인은
 
1954년 사울 뚝섬에서 태어났다. 중악대 약학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약학박사를 취득했다. 1985년 강원대 약학대 교수로 임용돼 미국 텍사스주립대 의과대 방문교수와 강원대 약학대 학장을 역임했다.
1989년 시대문학으로 등단한 이후 《문학과 창작》 등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내가 안고 있는 것은 깊은 새벽에 뜬 별》, 《고슴도치 사랑》, 《가시가 있어도 함함한 고슴도치 사랑》, 《왕버들나무 고아원》, 《네 곁에 내가 있다》, 《PHARMacy IN ART》 등 6편의 시집과 1편의 산문집을 발표했다.

오동철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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