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네의 일기》는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유명한 책이다.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작가가 되고 싶었던 안네 프랑크(1929-1945)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지만, 나치의 유태인 박해를 피해 1942년 가족들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안네는 홀로코스트(유태인대학살)를 피해 2년간 은둔지에서 숨어 지냈다. 그러나 독일군이 네덜란드를 침공한 이후 1944년에 게슈타포(나치의 비밀경찰)에 체포돼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를 거쳐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짧고도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다.

《안네의 일기》에는 은둔지에 갇혀 살며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리는 안네의 절실함, 유별난 이웃 아저씨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투덜거림, 성숙해져 가는 안네가 느끼는 첫사랑의 풋풋함 등이 들어있다. 역사책이 아닌 개인의 일기장이 역사가 되었기에,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가슴 아파했다. 전쟁 후에 그녀의 일기장을 발견한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어느 인터뷰에서 “내 딸이 이렇게 생각이 깊은 아이인 줄 몰랐다”고 말해 전 세계 사람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책 속의 주인공이 아닌 실존인물 안네 프랑크의 메모리얼은 베를린, 암스테르담 등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그녀의 흔적은 그녀가 출생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많이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그녀가 살았던 곳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안네 프랑크 학교(Anne Frank Schule)’다. 1960년에 개교한 학교인데, 15세에 생을 마감한 안네 프랑크의 또래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로, 우리나라와 비교하자면 중학교 쯤 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또 하나의 흔적은 프랑크푸르트 시내에서 멀지 않은 돈부슈(Dornbusch) 지역의 ‘Offener Anne Frank Bücherschrank (열린 안네 프랑크 책장)’ 메모리얼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작가가 되고 싶었던 그녀와 잘 어울리는 메모리얼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책장은 관상용이 아니다. 누구든 원한다면 책장을 열고 무료로 이 책들을 읽을 수 있다. 이곳에서 책을 대여하고 싶은 이들을 위한 규칙이 ‘안네의 책장’에 적혀있다. “당신은 읽은 책을 돌려놓아야 합니다.”

Offener Bücherschrank Bibliothek(열린 책장 도서관)이라고 불리는 이런 책장 형식의 도서관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종종 마주칠 수 있다. 물론 읽은 후에 반드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 대여자의 이름이나 연락처를 기재하는 곳도 없고, 이 도서관을 지키는 사서도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규칙을 제대로 지키는 덕분에 이 ‘열린 책장 도서관’은 잘 운영되고 있다. 사람들이 ‘안네 프랑크 책장’을 자연스럽게 이용하면서 그녀의 존재 또한 너무나 자연스럽게 독일인들에게 인식돼 있다.

이번 취재를 위해 기자는 따뜻한 봄 햇살이 내리쬐는 점심시간에 작은 광장 한 가운데에 세워진 ‘안네 프랑크의 책장 도서관’을 향했다. 이 책장에 관한 모든 메모리얼을 꼼꼼하게 읽고 사진촬영을 하는 내내, 광장의 벤치에는 많은 독일인들이 저마다의 점심휴식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독일인들이 아무리 부끄러운 과거사를 인정하고 용서를 빌지만, 그래도 독일의 수치스러운 이면을 검은 머리카락의 동양인이 열심히 취재하는 모습이 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 때문에 눈치를 살폈지만, 이 상황을 어색해하는 사람은 오직 기자 자신뿐이었다. 고등학생 쯤 돼 보이는 한 독일 여학생이 “사진 다 찍었으면 저 책 좀 고를 수 있을까요”하며 미안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독일인들이 안네 프랑크가 누구인지 모르고, 이 책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이곳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휴식을 취하며 책을 빌려보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 ‘사죄’는 그냥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상인 것이다. 안네 프랑크의 책장 뿐 아니라 세계대전 중의 모든 죄악에 대해 부끄러워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럽기에 숨기지 않고 반성하는 태도일 뿐이다. 독일은 사죄하는 방법을 분명히 알기에, 희생자들은 가슴의 한을 지금이라도 조금씩 위로받고 있고, 전 세계의 많은 강대국들에게 평화에 대한 좋은 본이 되고 있다.
▶34호에 계속

독일에서 정은비 시민기자(타악기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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