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역시 ‘사랑’이다. 누군가 묻는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사랑을 왕가위만큼 끈적이게 그리는 감독이 있겠느냐고. 그가 그리는 사랑은 장르를 초월하고<2046>, 불륜을 끌어안으며<화양연화>, 남미의 추레한 거리나 사막의 무림도 배경으로 삼는다<동사서독>.

<화양연화>는 방탄소년단의 앨범제목으로도 쓰이거니와 ‘꽃다운 시절’ 즉, 인생의 가장 좋은 시절을 일컫는 말이다. 1962년 홍콩의 한 다세대주택. 같은 날 리첸과 차우는 바로 붙어있는 옆집으로 이사를 온다. 리첸(장만옥 분)은 작은 개인회사 사장비서요, 차우(양조위 분)는 일간지 데스크다. 리첸의 남편과 차우의 아내는 각각 해외출장과 야근으로 거의 집에 오지 않는다. 두 사람은 배우자의 상실로 생긴 시간을 종종 혼자 영화를 보거나(리첸), 거리에서 국수를 먹는(차우) 것으로 때운다.

좁은 건물계단을 차통(찻물을 담는 통)을 채우느라, 국수를 먹으러 가느라 여러 차례 오르고 내리며 부딪히는 두 사람. 어느 날 함께 국수집에 마주앉은 두 사람은 해외에서 사왔다던 아내의 핸드백이 리첸의 핸드백과 같고(차우), 남편의 넥타이가 차우의 넥타이와 같은 걸 보고(리첸) 자신의 남편과 아내가 상대방의 아내와 남편과 불륜관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 때부터 두 사람은 동병상련의 처지에서 함께 차 마시고 책 이야기를 하고 무협소설을 쓰겠다는 희망얘기도 하며 서로를 알아간다.



가랑비에 옷 젖듯 연모의 정이 자란 두 사람. 둘의 대화에는 항상 배신한 그들의 남편과 아내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확인한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사랑의 감정을 절제하는 것도 고통이리라. 손 밖에 잡지 않았지만 다세대주택이라 이런저런 소문이 나자 차우는 싱가폴 근무를 자원하고 장대비 오는 처마 밑에서 리첸에게 고백한다. “나도 모르게 사랑하게 되었다. 당신이 남편과 함께 있을 생각을 하면 질투의 감정이 생겨서….” 그리고 이별연습을 제안한다. 통곡하는 리첸을 가만히 안아주는 차우.

수년이 지난 후 다세대주택을 찾은 리첸은 마침 자신이 살았던 집을 팔겠다는 주인 말을 듣고 그 집을 산다. 몇 년 후 홍콩으로 돌아온 차우도 다세대주택을 찾는다. 그리고 바뀐 주인에게 옆집에 누가 사는지 묻지만 어떤 여자가 아이와 함께 산다는 대답만 듣는다. 어긋남도 역시 사랑의 속성인가보다. 두 사람은 언젠가 비밀얘기는 오래된 나무 파인 틈새에 하고 진흙으로 메우는 민간 풍속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었다. 리첸을 잊지 못하는 차우는 취재 차 찾은 캄보디아 사원 돌 기둥에 파인 홈에 입을 대고 자신의 비밀스러웠던 사랑을 오래오래 털어놓는다.

영화 속 차우가 소설을 쓰겠다며 얻은 아파트 호수가 2046. 둘의 절제로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그 방의 번호는 ‘화양연화’ 제작 3년 후, 왕가위의 <2046> 제목으로 다시 태어나고 그 속편에서 다시 양조위는 차우 역으로 리첸과의 사랑을 소중히 생각하면서도 그 방에서 뭇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한량으로 열연한다.

옷 잘 입는 여자는 마음이 허하다고 했던가. 영화 내내 장만옥이 입은 치파오의 아름다움이 압권이다. 장만옥의 그 긴 목과 길고 긴 허리가 30여벌 치파오의 아름다움을 백 분 살리며, 두 사람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마주칠 때 느린 템포의 화면에 맞춰 나오는 세르게이 트로파노프의 ‘In the Moon for Love’(스즈끼 세이준의 ‘유메이지’ 테마곡)’의 낮고 힘 있는 바이올린음색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아픔을 그대로 전해준다. OST 냇킹 콜이 부르는 ‘Quizas Quizas Quizas(아마도 아마도 아마도)는 또 어떤가.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천하제일갑은 역시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고통을 호소하는 양조위의 그 우수에 찬 큰 눈, 눈빛! 이 눈빛은 양조위에게 그해 53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이경순 (춘천여성민우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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