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우리 반 아이들은 나만 보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거나 이것저것 묻느라 참으로 바쁘다. “저 좀 안아주세요.” “안아서 한 바퀴 돌려주면 안돼요?” “저 기분 나빠요.” “이거 왜 그런지 알아요?” “나 오늘 발표 안 하면 안 돼요?” “나 머리 어디 미용실에서 했게요?” “어제 저녁에 아빠가 치킨 사줬어요.” “○○이가 내 이름 아닌데 다르게 불러요, 쟤 좀 혼내 주세요.” … 먼저 말 걸은 아이와 눈 맞추고 있는데도 옆에서 내가 듣거나 말거나 주절주절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아이들도 있다. 아! 특별히 아침에는 눈과 귀가 여러 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래, ‘키스’처럼 묵묵히 아이들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을 어루만지고 위로해 주는 누군가가 늘 필요하구나!

‘키스’는 그림책 작가 권윤덕의 《피카이아》에 나오는 골든레트리버, 덩치 큰 개다. 이 그림책은 2010년 순천 ‘기적의 도서관’에서 ‘키스’라는 커다란 개에게 아이들이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책을 읽어주는 프로그램을 보고 만든 그림책이다.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아이들이 키스에게 다가와 얼굴을 비비고 끌어안고 털을 쓰다듬으며 귓속말을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엄마, 아빠가 돈을 벌어야 한다며 자기를 할아버지에게 맡기고 보러 오지 않는 것이 억울한 상민이, 시험점수 올리고 등수 올리는 데에만 관심 있고 내가 무얼 원하는지 관심조차 없는 엄마를 떠나 세상 속으로 한없이 날고만 싶은 미정이, 엄마 아빠의 싸움이 끊이질 않고 신발바닥의 껌딱지 취급을 받으면서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윤이, 아빠가 정리 해고의 위기를 넘기고 겨우 복직하게 된 채림이네, 육식 공룡마냥 생간과 피가 밴 고기 살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사람들과 구제역 괴담이 불편한 강안이. 아이들은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며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럽’다면서 키스에게 모든 걸 다 속삭인다. 그럴 때마다 키스는 아이들 손과 얼굴을 핥아주고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준다.

한없이 불공평하고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는 현실을 우리 아이들은 이길 수 있을까? 잘린 가지에서 새잎을 돋우고 가지를 뻗어 세상을 당당하게 마주할 수 있을까? 마지막에 혁주가 등장해 ‘피카이아’ 이야기를 한다. ‘피카이아(Pikaia gracilens)’는 고생대 캄브리아기에 살았던 동물로 크기는 4~5센티미터, 몸통에는 척삭(척추의 기초)을 따라 근육 다발이 붙어 있는데 척추동물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다. 고생대 그 많은 동물들이 어떤 종은 멸종하고 어떤 종은 살아남았는데, ‘피카이아’라는 그 작은 동물이 ‘생존’을 거듭하면서 이겨냈고 그래서 인간이 생겨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혁주는 엄마 얼굴조차 기억을 못하지만 ‘피카이아’를 보면서 아득한 그리움, 그리고 고소한 엄마 냄새까지 느낀다. 나아가 ‘피카이아’가 전하고 있는 ‘생존’이라는 말을 기억하려고 한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쾅쾅 뛰고 코와 입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친구 윤이에게 달려가는 혁주의 모습을 보면서 ‘살아있음’ 자체가 주는 놀라움을 어느새 깨닫게 된다.

작가는 이 그림책을 통해 사람은 ‘피카이아’처럼 스스로 치유하고 성장할 수 있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또한 힘겹고 어지러운 세상을 이기고 바꿀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은 힘든 현실을 통해 ‘피카이아’를 끌어내는 글 구성뿐만 아니라, 매우 불편함을 주는 그림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거대한 바퀴벌레를 내려다보고 있는 상민이와 고양이 모습, 사람의 몸을 닮은 돼지나 닭의 몸, 털실 올이 풀리듯 풀어지는 몸, 뭉툭하게 잘려나간 가지가 붙은 윤이의 머리, 피를 마시고 생간을 먹는 엄마, 아빠의 모습 등의 장면은 생각의 확장과 인식의 전환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림책의 예술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서로에게 ‘피카이아’이고 ‘키스’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 특히 우리 아이들에게 ‘사랑하는 나의 피카이아 그라실렌스!’라고 말해주자.

* 그라실렌스(gracilens): ‘우아하고 아름다운’이라는 뜻.

 

황현정 (신남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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