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마음의 소리, 문자는 마음의 그림”이라는 유명한 언설이 담긴 중국 최초의 문학비평서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 저자인 유협(劉勰)은 창조적 문체가 지닌 특성의 하나로 난해함을 꼽았다. ‘이해가 쉽지 않음’을 뜻하는 난해함은 몇몇 사려 깊은 비평가들을 제외하고는 독자에 대한 작가의 불친절함과 무시, 현학(衒學) 취미로 치부돼왔다. “도대체 누구더러 읽으라는 말이냐”는 볼멘소리는 “작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이라는 의심으로 바뀌고, 급기야 “쓰레기”로 종지부가 찍혔다.

30여 년 전, 군에서 제대를 하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 뒤 한 해 동안 책읽기에 빠져 지내며 헌책방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어느 날,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經夜)》 원서를 손에 넣었다. 난해한 조이스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가장 난해하다고 알려진 그 소설을 집어든 것은, 사실 읽는다기보다는 ‘구경’하자는 뜻이었다. 실제로 나는 그 소설을 단 한 페이지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면 마치 만트라를 읊듯 한 오 분쯤 아무데나 펼쳐서 흥얼거리곤 했다. 그러다가 그 헌책방에서 김종건 교수가 쓴 《피네간의 경야, 해설서》를 발견했는데, 소설의 번역본보다 해설서가 먼저 출간된 건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이 책을 우리말로 읽게 된 건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1990년대 후반이었는데, 하지만 그때도 ‘읽었다’기보다는 여전히 ‘구경’한 것에 불과했다.
난해하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스피노자나 화이트헤드의 철학서만큼이나 이해하기 힘든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성채와도 같다. 그가 만약 ‘언어의 유희’를 즐겼을 뿐이라면, 이때의 유희는 온전히 작가 자신만의 것이다. 독자가 이 유희에 동참하려면 작가의 지적 사유를 공유해야 하는데, 설사 공유한다 하더라도 작가의 고유한 개별성까지 공유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쯤 되면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무의미해지며, 창작은 결코 독자를 위한 것도, 독자를 염두에 둔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독자가 존재하지 않는, 오직 작가 자신만이 독자인 창작 - 이것은 얼핏 창작의 보편적 개념을 벗어난 듯 보인다. 하지만 이 문제를 조금 더 깊이 고민해 보면 창작의 본질에 다른 의미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최초의 창작자라 할 수 있는 신의 ‘의지’를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독자가 존재하지 않는, 작가 자신만을 위해 쓰인 것처럼 보이는 《피네간의 경야》와 같은 난해한 창작물은 작가의 의미를 새롭게 묻고, 이 물음은 창작자로서의 신을 궁리하게 만든다. 또한 이 물음은 독자의 허구성에 대한, 나아가 독자의 진정한 자격에 대한 물음으로 환원될 수도 있다.

얼마 전, 국제적 권위를 가진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문자 그대로 장안의 지가를 올리며 불황의 서점가를 휘저었다. 60만 부 이상이 팔려나간 이 소설집은 실은 10여 년 전에 세상에 나왔던 구간도서이고, 그때의 판매고는 1만 여 권에 불과했다. 이 유별난 현상을 보며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새삼스레 묻게 된다.

하창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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