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나 예술품에 날인하는 인장은 기관이나 개인의 신용을 나타내는 신표다. 이 때문에 흑심을 품은 자들이 문서나 예술품을 위조할 때 인장의 위조는 필수였다. 심지어는 인장을 위조해 혼인신고를 하는 일까지 있으니, 인장은 그 막강한 효용성에도 불구하고 역기능도 많았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살던 시대에도 이런 일은 심심치 않게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목민심서》의 제9조 〈刑典六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제일강산> 조선 중기 문인 홍석구의 인장

5조 禁暴(횡포를 금함)

인장을 위조한 자는 그 정황을 살펴서 그 경중에 따라 단죄한다(印信僞造者 察其情犯 斷其輕重). 관인(官印)이나 각 궁궐의 인(印)을 위조한 자는 각각 법에 의해 처리한다. 또 호장(戶長)의 도장 두 개를 합하여 네모꼴로 만들기도 하며, 헌 병거지나 마른 박조각 같은 것으로 조잡하게 전자를 새기기도 하는데, 이런 것은 가벼운 벌로 처리해야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인각기능사’라는 자격증이 있었고 ‘인판업’이라는 공식적인 직업이 있었다. 1992년 우리나라 열네 번째 은행인 평화은행을 설립하면서 은행에서 금융거래에 선진국처럼 도장 대신 서명(sign)을 사용하겠다고 한 것을 당시 재무부가 허용하면서 백여 년을 이어온 인장제도가 근본적인 변화에 직면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명의 영역은 급격히 넓어지고, 인각기능사라는 자격증제도가 폐지됐으며, 인판업은 사양길을 걷게 됐다. 그러나 ‘부자가 망해도 삼년 간다’고 현재에도 수많은 인장제작업소가 전국에 존재하고 있으며, 이들은 아직 다양한 인재와 글자 형태, 그리고 그동안 축적된 기술로 대중과 접촉하고 있다. 인장포에서 사용하는 인장의 재료는 흑단이나 회양목 같은 단단한 목재와 각종 동물 뼈, 그리고 플라스틱, 보석류로서 전각석을 주로 다루는 전각과는 구별된다.

#980000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면 직인은 아직 쓰고 있는 관공서가 많기는 하지만 상당수의 관공서와 회사에서 전자결재로 대체됐으며, 문서의 모서리에 찍던 계인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또한, 공통 내용을 찍던 고무인도 자취를 볼 수 없게 됐다.

#980000실용인이 급격히 사양길로 접어든 원인은 기본적으로 서명(sign)의 등장도 있겠지만 사회변화 과정의 필연이라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일본에서 시작된 일이지만 인장을 컴퓨터로 집자(集字)하고 새기는 기계를 발명한 것이다. 이는 같은 인장을 다수 생산할 수 있게 했으므로 위조를 방지해야 하는 인장 존재의 근본적인 의미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치과의사들에 따르면 치아의 본을 뜨는 방법을 이용하면 어떤 인장이든 완벽하게 재현해 낼 수 있다고 한다. 급격히 발전하는 고도사회의 변화과정에서 실용인(實用印)은 그 설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980000다만 실용인의 퇴조와는 대조적으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인장에 근거해 발전한 전각예술은 문자학, 조형성, 조각, 판화, 다양한 연출 등이 결합한 종합예술로 점차 그 위상을 높이고 있다. 특히 전각도로 전각석을 새겨 얻은 선질은 붓으로는 도저히 구현할 수 없는 것으로 새로운 미학 창작의 기대성을 높이면서 그 추이가 주목되고 있다.

원용석 (한국전각학연구회 이사)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