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하라 겨울에 시냇물 건너듯(與兮若冬涉川)
경계하라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猶兮若畏四隣)
《다산시문집》 〈여유당기〉


‘여유당(與猶堂)’은 ‘다산(茶山)’과 더불어 사람들에게 가장널리 알려진 정약용의 대표적인 호다. 요즘 호에 관심을 두고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를 읽으면서 이 말이 노자(老子)의 말을 인용한 것임을 알았다.

정약용은 조선을 대표할 만한 학문의 대가이고 개혁가였지만, 자신의 식견을 드러내는 데는 조심스러워 했다. 호를 통해 조선 후기 ‘남인’으로 사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엿볼 수 있다.

정약용이 사용한 수많은 호 중에서 후세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었던 것은 《다산시문집》 〈자찬묘지명 광중본〉에서 사용한 사암(俟庵)이라고 한다. ‘기다릴 사(俟)’, ‘암자 혹은 초막 암(菴)’. 사암이라는 호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경세치용과 개혁의 꿈을 실현시켜줄 ‘미래의 새로운 세대’에 대한 기다림의 표현이라고 이 책은 해석하고 있다.

요즈음 ‘다산길 걷기’에 동참하고 있다. 북한강을 따라 이어지는 수려한 경관을 보면서 겨울에 시냇물 건너듯 신중해야 하고,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경계했던 다산의 삶과 지금이 무엇이 다를까 생각해 본다. 다산이 기다렸던 ‘미래의 새로운 세대’는 아직도 여전히 출현하지 않은 듯 보이는 지금이다.

세상을 걱정하는 마음은 정약용과 같은 학문의 대가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지난 두 달간 유난히 연배가 높으신 어르신들의 책을 검토하고 발간할 기회가 많았다. 생애담 성격의 책을 만들고자 하는 동기는 격동의 역사를 살아오면서 겪었던 인생 이야기를 후세에 들려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학자로 산 사람이나 공무원으로 산 사람이나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경험담은 같은 책을 보는 듯 닮은 점이 많았다.

어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싶지 않은 젊은 시절이 내게 있었다. 과거를 공유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판단을 강요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집단 속에서 각 개인을 주목하는 ‘미시사’가 곧 한 시대의 역사를 이루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책을 만들면서 차근차근 역사의 질곡, 삶의 극한을 온몸으로 겪어낸 그들의 삶을 생각해본다.

도서관에 이처럼 생애담의 성격을 띤 책들이 수도 없이 반입된다고 한다. 일부는 책의 구성과 언어가 일정 수준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많다고 한다. 이제는 출판의 개념도 POD(주문형 소량인쇄) 시스템이 가능해지면서 출판의 유통보다는 개인의 기록과 소장을 위해 발간하는 경우도 많다. 책의 출판이 쉬워지는 만큼 책에 주어지는 절대적인 신뢰가 훼손될 우려도 크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럴 때 편집자의 할 일은 되도록 책이 주는 신뢰에 접근하도록 안내하고 편집하는 일일 것이다.

책이 단지 인쇄물에 그치지 않도록, 겨울에 시냇물 건너듯 신중하게….

원미경 (도서출판 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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