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용원 교수 역시 선화예술고등학교 재학 중에 홀로 독일로 공부하러 떠난 어린 소년이었다. 그에게도 독일에서의 첫 삶은 혼란스러웠지만, 남보다 덜 자고 더 노력한 끝에 머리카락만 검은색일 뿐 독일인과 다를 것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독일음악을 배우고 싶어 독일로 간 그도 ‘독일인보다 더 독일스러운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그것을 이루었지만, ‘나는 한국인인가, 독일인인가’하는 고민에 빠져야 했던 유학시절이 있었다.

그런 그는 누구보다도 강민형과 정은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성 교수 역시 진정으로 노력했고, 진심으로 혼란을 겪었기에 이 두 젊은 연주가들의 눈빛만 보아도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이 두 젊은 연주가들에게 해줄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아파하고 괴로워해라. 그 혼란스러움을 그냥 받아들여라. 그것도 다 너희들의 음악이 감당해야할 몫이고 너희들의 한 부분이다. 진심으로 아파하는 조개가 진주를 낳는 법이란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성 교수는 ‘플루트와 마림바 듀엣을 위한 가인과 가객’이라는 작품을 헌정했다. ‘가인과 가객’이 무엇을 그린 작품인지 묻는 두 사람에게 “신비한 동양에서 온 두 명의 젊은 연주자들이 서양에 한국의 정서와 얼을 전하고 매혹시키는 풍류객의 소리”라고 답했다. 악보를 살펴 본 두 사람은 곧장 신비로운 동양의 서정적이면서 우아한 역동성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곡이라고 입을 모았고, 두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곡이라고 생각했다.

자칫 한국 없이 ‘세계여행’을 할 뻔했던 주독일 한국문화원의 듀엣콘서트에 한국도 뒤늦게 안착했다. 그렇게 한국에서 온 두 풍류객은 그간 그들의 악기 하나로 이어 온 짧은 ‘풍류객의 삶’을 그려냈다. 너무나 화려하고 웅장하지만 100년 전에 시간이 멈춘 듯했던 러시아의 예술적인 흐느낌을 노래했고, 음악의 아버지인 바흐의 곡으로 빈틈없이 굳건하고 절제하는 겉과 달리 속으로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독일의 음악을 연주했다.

이어서 세련되고 자유로우며 클래식음악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미국 음악, 우아하고 색감적이면서도 당당하고 자부심 가득한 프랑스인을 닮은 프랑스 음악을 연주한 후에, 1부의 마지막 곡으로 벚꽃이 바람에 마구 흩날리는 속에서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사랑하는 정인을 그리워하는 듯한 일본 음악을 연주했다.

2부의 첫 곡은 작곡가 성용원의 ‘플루트와 마림바를 위한 가인과 가객’이 세계초연으로 연주돼 두 연주자 스스로가 방방곡곡을 다니며 버선발의 도포를 입은 풍류객으로의 삶을 그려냈다. 특별히 뜨거운 반응을 얻어 낸 ‘가인과 가객’에 이어, 영화음악 작곡가로 더 유명한 모리꼬네의 따뜻하고 발랄하지만 사랑스러운 영화음악 모음곡을 연주했고, 끝으로 유혹을 위한 싸구려 음악이라며 천시 받았던 고국의 탱고음악을 분석하고 고급화해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음악장르 중 하나인 아르헨티나 탱고로 만들어 낸 피아쫄라의 탱고를 연주하며 음악회는 막을 내렸다.

조선후기의 가객은 지금의 연예인처럼 그룹을 만들어 돈을 받고 연주했지만, 싸구려 예술로 돈에 영혼을 팔지 않았기에 항상 예술적 성취와 돈의 유혹 사이에서 갈등과 번민을 했다. 연주 된 모든 곡들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곡들이자 작곡가의 고국을 가장 잘 표현한 곡들이었다.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의 국가와 나란히 이름을 올린 대한민국의 명성을 드높인 연주라는 관중의 찬사에 두 풍류객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유행하는 것을 모방하고 베끼며 점점 자극적인 것에 만연해지는 이 시대야말로 정취를 즐기고 유랑하며 예술적 성취를 위해 가곡과 시조를 지어 연주하는 한국의 가인과 가객의 삶을 가장 필요로 하는 시점이 아닐까.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을 다시금 공감하는 저녁이다. 또한, 전통을 존중하고 지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세계의 다양한 문화들 또한 존중하고 받아드리는 독일이기에 더욱 성공적인 연주회가 가능했던 것 같다. 그런 독일인 관객들의 기대에 맞는 아름다운 저녁을 선물하고 선물 받은 사람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한국문화원의 밤이 깊어갔다.

정은비 시민기자 (베를린·타악기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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