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촌에서 시작한 협곡은 의암댐이 보이는 지점에서 끝난다. 의암리 앞에서 북한강이 굽이치며 현등협을 통과하는데 길이가 10여 리나 된다고 했을 만큼 긴 구간을 이제 자전거가 달린다. 그 사이에 호로탄(葫蘆灘)·쇠오항(衰吾項)·학암탄(鶴巖灘)을 지나왔으련만 어디인지 알 길이 없다. 다산은 의암리를 칠암촌(漆巖村)으로 표기한다. 아무런 의심 없이 의암리(衣巖里)라 생각했는데 다른 시각이 흥미롭다. 의암리 일대에 옻나무가 많아 옻으로 생업을 도모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웃 마을 칠전동(漆田洞)이 열쇠를 쥐고 있을 것 같다.

배는 이윽고 의암댐 부근을 통과하게 되었는데 다산은 주변의 바위벽을 쳐다보고 놀란다. 양쪽 모두 장엄했으나 오른쪽에 높이 선 바위는 마치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 기이했다. 이곳이 바로 석문(石門)이다.

천지가 갑자기 환하게 넓어지니 二儀忽昭廓
아! 들빛이 얼마나 웅장한지 野色噫何壯
두려워 숨죽이다 이내 풀리며 悚息俄縱弛
맑게 흩어져 갈 곳을 모르겠네 散朗疑所向


의암댐 위 신연교를 건너며 춘천 쪽을 볼 때마다 나도 이러했다. 특히 물안개 피어오르는 겨울엔 환상적인 무채색 그림이었다. 이곳은 춘천에서 절경으로 손꼽히던 곳이다. 북한강에 인접한 삼악산과 드름산을 아울러 ‘소금강’이라 부를 정도였다. 현등협이 긴 협곡이라면 이곳은 아주 짧지만 강렬한 협곡이다. 풍수에선 이곳을 수구(水口)로, 전략적인 입장에선 춘천의 목구멍과 같이 중요한 곳으로 인식했다. 시는 계속 이어지는데 다산은 이곳에서 역사를 떠올린다.

의암댐에서 바라본 석문.

작기는 하지만 옛날에는 나라였고 蕞爾曾亦國
하늘이 만든 특별한 지형인데 天作有殊狀
석문(石門)은 더욱 기괴하여 石門復奇譎
어부는 밤이면 늘 곁에서 漁人常夜傍
흥망성쇠의 자취를 생각하니 緬思興廢跡
천 년 지났으나 비통해지네 千載動哀愴


실학자 이익(李瀷, 1681~1763)은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 자체적으로 방어할 곳은 춘천 한 곳뿐이라며 말을 잇는다. “중첩한 산이 사방에서 둘러싸 옹호하고 가운데에 비옥한 들판이 있다. 한 사람이 관문을 막고 있으면 만 명도 뚫고 들어오지 못할 것이니, 정말 난공불락의 유리한 지리적 조건이다.” 한마디로 금성탕지(金城湯池)인 것이다. 그러나 천혜의 요새지만 역사의 흥망성쇠를 비껴가진 못했다.

중국의 한나라 광무제 때 춘천의 통치자는 유리한 지형에도 불구하고 외적의 침입에 죽임을 당했고, 아녀자들은 나가서 항복해야만 했다. 진한과 춘천 지역이 힘을 겨룰 때, 춘천의 토지가 비옥하고 백성들이 잘 살고 윗사람을 잘 따른다는 소문을 듣고 진한에서 백성을 거느리고 항복한 사람도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우두머리가 되고 싶었으나 끝내 왕 노릇을 하지 못한 역사를 언급하면서 다산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읊조린다.

흐르는 물 따라 모두 사라지고 微滅隨流水
푸른 산만이 묵묵히 있으니 寂黙餘靑嶂
슬프구나! 맥국의 일이여 哀哉夷貊事
굽어보고 쳐다보며 탄식하노라 俛仰一惆悵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는 형국이다. 맥국을 떠올리면서 다산은 지형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백성들을 험지로 내몬 어리석은 통치자를 비판한다. 그의 눈앞으로 19세기의 위정자들이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백성들의 고통을 모르쇠하고 자기 당파의 이득만을 탐하던 중앙 정계를 향해 다산은 이곳에서 비통함을 느꼈을 것이다. 신냉전시대로 스스로 뛰어드는 작금의 현상을 본다면 어떤 심정일까. 비통함을 넘어 분노의 장편시를 지을 것이다.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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