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번 〈우리 역사 속의 인장 이야기〉에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최초의 인장은 ‘낙랑의 봉니(封泥)’라고 했다. 이는 성인근의 《한국인장사》를 비롯한 여러 문헌을 참조한 것이다. 봉니라 함은 종이가 발명되기 전, 목간이나 죽간을 묶은 끈을 풀지 못하게 하려고 진흙을 바르고 그 위에 찍은 인장의 자국을 말한다.

낙랑의 봉니는 1918년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강면 토성리에서 발견된 이래 1937년까지 대략 200여과가 발견됨에 따라 낙랑이 한반도(북한 평양 북쪽)에 있었다는 증거로 활용됐다. 성인근은 “한반도에서 낙랑군 설치 이전에 과연 인장문화가 존재했는지의 여부는 기록과 출토물이 발견되지 않아 언급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한국 인장의 역사는 중원으로부터 전래되었으며 시작점이 바로 낙랑의 봉니와 인장”이라고 하면서, 낙랑의 봉니와 인장은 주로 일제강점기 낙랑유적 조사과정에서 수습된 유물들로 해방 후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컬렉션을 접수하면서 출발한 국립중앙박물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문성현은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에서 이 낙랑의 발굴자들이 일제 식민사학자들이라고 전제한 뒤 다음과 같은 위당 정인보의 주장을 실어 이를 반박하고 있다.
▲중국 전역을 통틀어 특정 군의 속현들의 봉니가 한 곳에서 이처럼 집중적으로 쏟아져 나온 전례가 없다. ▲작은 충격도 이기지 못하는 진흙 재질의 봉니들이 2천년 동안 대부분 아주 양호한 상태로 발견됐다. ▲일부 지역의 경우 ‘대윤(大尹)’ 등 봉니 속의 직함이 한대 당시의 직함과 시기적으로 부합되지 않는다. ▲각자 다른 시기에 제작된 봉니들이 한결같이 동일한 서체를 취하고 있다.

이 외에도 위당은 서너 가지의 이유를 더 들어 이 봉니들이 위조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문성재는 관야정이라는 일본 식민사관학자가 그 자신의 일기에서 북경의 유리창이라는 서점가에서 한(漢)시대의 유물, 특히 낙랑출토물을 대량으로 구입해 수집했다는 내용에 주목했으며, 어떤 역사 문헌에서도 ‘낙랑군은 한반도 북부의 평양에 있었다’는 분명한 기록이 단 하나도 없다고 하면서 위당의 위조설을 뒷받침했다.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주장은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 친일 식민사학자들에게서도 흔한 일이다.(이덕일,《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이전에 낙랑의 봉니를 다룬 책들은 모두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최초의 인장의 흔적이라는 것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만약 일제 식민사학자들에 의해서 위조된 것이라면, 이는 한국의 인장과 전각사의 관점에서도 신중하고 면밀히 접근해야 할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원용석 (한국전각학연구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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