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임에 역행하는,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가장 악랄한 만행을 우리는 기억하고 보존해야 한다.”

세계전쟁으로 유럽 전역에서 무고한 이들이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폴란드만큼 어려운 시간을 보낸 국가도 없을 것이다. 특히 북동부의 러시아와 서부의 독일 사이에 끼어있는 지리적 특징 때문에 수도 바르샤바는 90% 이상이 파괴됐다. 전시의 폴란드 수도는 바르샤바였지만, 폴란드왕국의 역사 속에서 약 1천년 동안 수도였던 도시는 남동부에 위치한 크라쿠프라는 도시였다. 다행히 유서 깊은 궁궐과 교회들이 잘 보존되어 있고, 리넷 글로브니 광장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크라쿠프에서 60km를 더 가면 수도 바르샤바만큼이나 익숙한 도시의 이름을 들을 수 있다. 바로 오시비엥침(Oświęcim). 독일식 이름인 ‘아우슈비츠’로 더 익숙한 곳이다. 나치가 건설한 최대 규모의 수용소. 감금, 노역, 고문, 생체실험 등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잔학한 행위를 체계적으로 저질렀던 곳. 카펫을 만들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내고는 샤워를 하게 해준다고 유인해 가스실에 넣어 모두 독살했다. 왜 하필 ‘샤워’를 하자고 했을까? 그렇게 순순히 옷을 벗어야 시체를 처리하기 편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시체는 가스실 바로 옆의 화장터에서 처리됐다. 이 극악무도한 수용소는 고압선이 흐르는 전기담벼락을 사용했는데,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포로들이 스스로 달려들어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것이 행운이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은 연간 153만명 이상(2014년 기준)이다. 독일인들과 함께 이곳을 방문했다. 젊은 시절에 전쟁을 지냈을 법한 지팡이를 짚은 노부부, 20대의 젊은 연인, 어린 자녀들을 동반한 부모도 있었다. 폴란드인들이 독일의 나치가 저지른 만행을 고발하기 위해 박물관화 해놓은 아우슈비츠수용소에 독일인들이 찾아와 있다. 나는 서대문형무소와 독립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일본인 방문객을 본 적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정신없이 머릿속을 뒤졌다.

‘Arbeit macht frei(노동을 하면 자유로워진다).’라는 기만적인 문구가 쓰인 입구에 들어섰다. 날씨가 매우 뜨겁고 방문객이 많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가끔 어린아이가 칭얼거리면 그의 아버지가 바짝 다가앉아 엄숙한 표정으로 설명을 했다.

수용소 마당의 나무상자를 들여다보던 독일인 아가씨는 ‘이 나무상자는 교수대고 동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포로를 목매달아 죽였다’라는 설명을 듣고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를 했다. 뼈가 앙상하게 남은 유태인 어린이들의 자료사진을 본 독일인 아주머니는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수용소 복도에서 숨바꼭질을 하려던 어린 아들을 번쩍 든 독일인 아버지가 고문을 하던 방 안을 들여다보게 하면서 뭐라 설명을 하자 아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가이드의 설명에 독일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모은 두 손이 벌벌 떨리도록 기도를 했다. 독일어를 할 줄 아는 폴란드인이라고 밝혔던 가이드가 ‘이제 그만 가자’고 할 때까지 독일인들의 묵념과 기도는 계속됐다. 문을 열어달라고 울부짖다가 가스실 벽에 새하얗게 남겨놓은 손톱자국과 문틈에 박혀있는 그들의 손톱들을 보며 나 역시 눈을 감아버렸다. 일제에게 고통 받던 우리 민족이 오버랩 돼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는데, 이 독일인들은 죄책감에 눈을 감아버렸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버스로 10분을 가면 비르케나우 수용소가 있다. 그곳은 그늘이 하나도 없는 매우 광활한 부지다. 어린 자녀를 데리고 온 부모는 여기서 떠났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르케나우 수용소를 가겠다고 했다. 가이드가 이곳의 최고령자로 보이는 지팡이를 짚은 독일인 할아버지에게 괜찮겠냐고 묻자, “나는 비르케나우에 가겠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다음에 못 올지도 모르거든요”라고 했다.

독일은 분명 나치라는 이름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그 때문에 총리가 바르샤바의 묘지에서 무릎을 꿇고, 전쟁범죄에 대해 보상을 하고, 전범국가의 오명을 씻기 위해 국제사회에서 평화를 위한 더 큰 책임을 감당하고 있다. 그럼에도 독일인들은 휴가철이면 가족과 연인과 자녀들과 아우슈비츠수용소를 찾아와 눈물을 떨구고 스스로 괴로워하다가 떠난다. 수용소를 견학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정 기간 악몽을 꾸고 입맛을 잃고 컨디션이 저조하다고 호소하고. 독일인이라고 극악한 모습을 이기는 특별함도 없을 터인데 이렇게 수용소를 끊임없이 방문한다.

“왜 독일인이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것을 특별하게 생각하니?”라고 묻자 “그건 인간이 당연히 느끼는 감정이야.”라며 독일인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입을 열었지만 목이 메어 얼른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에게 ‘한국도 이보다 더하다면 더 한 피해를 입었지만, 사과를 받지 못했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내 독일어가 매우 서툴거나 몹쓸 농담을 하고 있다고 여긴다. 어쩌면 우리는 그토록 서툴고 몹쓸 상황에 놓여있는지도 모르겠다.

 

정은비 시민기자 (베를린·타악기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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