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의 큼지막한 날짜 앞에는 이런 알 수 없는 숫자가 깨알처럼 쓰여 있었다. 30여년 넘게 당뇨를 앓고 있는 김할아버지는 콩팥기능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하지마비상태였다. 여든이 넘은 할머니 혼자 할아버지 병수발을 몇 년째 해오며 임대아파트에 노부부만 덩그러니 살고 있었다. “할머니, 달력의 저 숫자가 무슨 뜻이에요?” “할아버지가 그린비아 드신 시간이요.” 그린비아는 밥을 넘기지 못하는 할아버지에게 드리는 캔으로 된 유동식이다. “그럼 숫자 앞의 점은 뭐예요?” “그때 혈당 쟀다는 표시에요.”

몇 년 전 의료생협에 근무할 무렵 김할아버지의 혈당이 측정이 안 될 정도로 높다는 재가방문팀의 얘기를 듣고 그날 저녁 두 노인이 사는 집에 왕진 갔을 때의 모습이다. 환자의 상태를 보면 가족이 어떻게 돌보고 있는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 기나긴 세월을 와병상태로 지냈지만 김할아버지는 거의 욕창이 없었다. 할머니는 하루 다섯 번씩 꼬박꼬박 할아버지의 식사를 챙기고, 혈당을 체크하고, 혹시라도 잊어버릴까봐 매일매일 달력에 그 시간을 표시했던 것이다.

그 노인들처럼, ‘운이 좋다면’ 우리는 모두 노인이 된다. 그것은 곧 우리들 중 다수가 생의 막바지엔 김할아버지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주변을 돌아보면 우리를 안심시키는 수많은 시스템이 있다. 요양병원도 있고, 수많은 돌봄 서비스들도 있다. 하지만 어떤 요양원도 집을 대신하지 못하며, 어떤 요양보호사도 가족의 보살핌을 대신해줄 수 없다. 그럼에도 지금 이대로라면 우리들 대부분은 집에서 가족들의 보살핌 속에서 죽지 못한다. 이유가 뭘까?

가장 중요한 건 의사가 환자를 찾아가는 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다. 하반신이 마비인 사람과 두 다리가 멀쩡한 사람이 만난다. 누가 누구를 찾아가야 할까? 지금의 시스템은 두 다리가 멀쩡한 사람(의사)은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하지마비인 사람이 휠체어를 타고라도 그를 만나러 가야 한다. 이 시스템이 정상일까?

거칠게 얘기하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의사에게 왕진을 허락해야 한다. 그리고 노인들이 정치세력화 되어야 한다. 노동자에겐 노동조합이 있듯이 노인들 스스로 노인들의 이익과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만들어야 한다. 너무 황당한 얘기인가? 하지만 이 황당한 얘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린 결국 대부분 시설에서 죽게 될 것이다.

그때 왕진을 다녀오고 몇 달 후 나는 김할아버지가 끝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할머니 건강에 중대한 문제가 생기면서 대학병원에 장기간 입원을 해야 했고, 돌봐줄 사람이 없던 할아버지는 결국 요양원에 입소해야만 했다. 집과 할머니의 손을 떠났던 할아버지는 입소한 지 몇 주 만엔가 욕창을 심하게 앓다가 눈을 감았다. 사랑은 대신이 없다.

양창모(가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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