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여명, 광활한 평원, 둘러 싼 산의 모습들이 어슴푸레 밝아오기 시작하는 새벽녘. 저 멀리서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화면을 가로지르며 영화는 시작된다.

차를 얻어 타고 온 듯이 한 청년이 내리고 잠시 후 또 한 대의 낡은 소형차가 들어오며 또 한 청년. 생면부지의 열아홉 두 청년, 애니스(히스 레저)와 잭(제이크 질렌할)은 그렇게 와이오밍 브로크산의 양치기로 만난다. 형과 누나 손에 크며 목장일 등을 전전해온 애니스와 신통찮은 로데오 선수 잭. 신산하게 살아온 둘은 넓디넓은 산, 초록 대자연 속에서 급속히 친해지고 어느 날 사랑을 나누게 된다. 낯선 감정 앞에 당황하며 동성애자가 아님을 다짐하면서도 끌리는 감정은 어쩔 수 없다.

겨울이 다가오자 산을 내려와 각자 일자리를 찾아 헤어진 후 애니스는 알마와 결혼해 두 딸의 아빠가 되고 슈퍼에서 일하는 아내와 아이 둘을 키우느라 삶이 힘겹다. 로데오경기에서 알게 된 부잣집 딸 루린과 결혼한 잭은 생활은 여유로우나 부유한 장인과 돈벌이에만 바쁜 아내에게 무시당하는 삶이 행복하지는 않다. 애니스가 그리워 브로크산 양치기를 해보려고 다시 산을 찾기도 했던 잭. 잭의 연락으로 4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은 브로크산으로 가 재회의 기쁨을 마음껏 향유한다. 둘만의 삶을 제안하는 잭에게 애니스는 아내와 딸과 가정을 얘기하며 용기를 내지 못하고 그저 1년에 두어 번씩 만나자고 답한다. 매번 14시간을 달려 애니스를 만나러 오는 잭, 매번 알마에게 1~2일의 밀회를 낚시로 핑계 대는 애니스에게 브로크산은 출구 없는 사랑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해방구요, 대자연 속에서 맘껏 숨 쉴 수 있게 해주는 마술의 장소요, 그들의 사랑을 감싸 안아주는 유일한 장소다. 그러나 현실 속의 삶은 엉망이다. 특히 애니스에게. 둘의 관계를 알고 고통스러워하던 알마는 애니스와 이혼하고 그 소식에 기뻐 한달음에 달려온 잭에게 애니스는 딸을 핑계로 돌려보낸다. 눈물을 흘리며 돌아오는 잭. 사랑을 거절당한 자의 삶이 제대로일 리가 없다. 잭은 다른 남자와의 하룻밤을 찾기도 하고, 이웃의 아내와도 지속적인 불륜관계를 갖는다.

그러던 어느 날, 애니스는 잭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잭이 죽으면 브로크산에 유골을 뿌려달라고 했다는 것을 알고 애니스는 잭의 고향을 찾는다. 애니스는 잭이 실제로 자신과 함께 목장을 하려고 애썼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이 무너진다. 잭의 옷장에 걸린 두 벌의 셔츠, 열아홉 그 시절 잃어버린 줄 알았던 셔츠 위에 그 당시 잭이 입었던 데님 셔츠가 덧입혀져 있었다. 망설이는 애니스를 그렇게 뜨겁게 원했던 잭의 모습처럼….

다시 푸른 여명, 광활한 평원, 둘러 싼 산의 모습들이 어슴푸레 밝아오기 시작하는 새벽녘. 애니스와 잭이 만났던 바로 그 장소. 애니스의 일터다. 저 멀리서 자동차 한 대가 달려온다. 내리는 딸 알마. 열아홉 살 알마는 아빠 애니스에게 결혼을 알린다. 열아홉 그 시절 시작된 사랑을 20년이 지나도 이루지 못했건만 딸은 1년 만에 이루어내다니…. 결혼식 참석을 제안하는 알마에게 양치기일 핑계를 대던 애니스는 문득 떠올린다. 먼 길을 달려온 잭에게 방목일을 비울 수 없다고 거절해 맘 아프게 했던….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참석하마.” 환해지는 알마의 얼굴. 옷장 문 안쪽에 붙여있는 브로크산의 사진, 잭의 데님셔츠 위에 덧입혀진 애니스의 옷, 살짝 비스듬히 걸린 브로크산의 사진을 바로잡으며 애니스가 하는 독백, “I swear.”

참 연기를 잘한 히스 레저는 조연상만 많이 받은 불운의 배우다. 그가 이 영화로 주연상을 받았더라면 혹시 살아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극 중 성격에 맞게 거의 입술을 떼지 않고 말하던 그의 연기가 오래 뇌리에 남는다. 극 중 적극적인 제이크 질렌할. 현실에서도 적극적이라 할리우드의 바람둥이로 소문나 있지만 영화 속 연기는 참 좋다. 54년생으로 동양인 감독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상 감독상을 받아 대만의 위상을 높인 이안 감독은 말한 바 있다. “사랑의 불가능성을 그리고 싶었다. 장애물을 넘어선 후에야 애매했던 사랑의 정체를 찾게 되는….” 그러게. ‘내가 좋아하고 그도 좋아하더라’가 안되고 조금씩 시간이, 마음이, 상황이 어긋남으로 해서 얼마나 많은 사랑이 울고 웃고, 새 세상을 보고 나락에 떨어지기도 하는가? 사랑은 생태적으로 고통스럽다. 과연, 사랑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자, 당신의 브로크산은 어디인가?

 

이경순 (홀트강원후원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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