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로부터 인간은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을 모두 믿을 수는 없으니 문서와 약속의 불확실성에 대한 보증을 원했다. 모헨조다로 유적의 인장 출토나 유럽의 왕가와 귀족들의 반지 인장, 고대 중국 주나라로부터 시작한 금속 인장의 사용 등을 볼 때, 불신에서 신뢰를 확보하려는 사람들의 심리는 동서고금이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이러한 의도가 상당히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중국에서 인장의 제작방법은 주로 금속을 이용한 주물을 사용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거의 위조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야금술이 점차 일반화되고 청동기와 철기의 사용이 늘어남에 따라 인장의 사용은 끝없이 위조라는 위협에 시달리며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그러므로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나게 된다. 문자의 필획을 무수히 꼬부려 복잡하게 한다든가, 인장 안에 독특한 문양을 넣는다든가,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넣는 등의 방법이 고안됐다. 그중 아예 현재의 사인(sign)과 같이 다른 사람이 내용을 알아볼 수 없게 한 것이 수결(手決)이다. 이것은 문서에 자신의 이름을 초서로 휘갈기거나, 자체(字體)의 위치를 바꾸거나, 글자를 분해함으로써 남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한 것인데, 임금이나 관리들의 문서에 보인다. 특히 관리들은 수결 안에 일(一)자를 길게 긋고 그 위나 아래에 점이나 곡선, 원 등을 추가해 ‘일심(一心)’이라는 글자가 포함되게 만들어 썼다. 이것은 관리가 결재할 때 한마음으로 하늘에 맹세해 사심(私心) 없이 공심(公心)으로 한다는 뜻이었다. 문서에는 이름이나 직함의 밑에 수결했는데, 먹과 붓이라는 서사도구가 만들어 내는 독특한 선질과 획의 장단(長短), 먹의 농도, 각 개인의 특질이 포함된 운필의 모습 등에 따라 매우 개성적으로 표현돼 위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글씨를 몰라 수결을 사용할 수 없었으므로, 자신의 손을 종이에 대고 그린 수촌(手寸)을 사용했다. 또한 중국과 한국 공통으로 이 수결을 인장처럼 새겨 문서의 끝에 찍기도 했는데, 이것을 화압인(花押印)이라고 한다. 특히 임금의 수결을 새긴 인장을 어압(御押)이라고 했다.

수결과 관련해 오성부원군 이항복의 일화가 전해진다. 이항복은 다른 획은 긋지 않고 단지 한일자(一)만을 그어 수결로 삼았다. 이항복은 관직이 높다보니 많은 문서를 수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 자기가 처리하지 않았는데 자기가 처리했다는 문서가 하나 있었다. 이항복은 수결을 가져오라고 했다. 담당자는 이항복이 수결했다고 하는데 자기는 수결하지 않았으니 다른 수결과 비교하려는 것이었다. 수결을 비교한 결과 다른 수결은 모두 획의 양쪽 끝에 바늘 구멍이 있었는데 그 문서에만 바늘구멍이 없었다. 이로써 진위는 밝혀졌으나 수결의 비밀이 드러나 오성대감은 수결을 새 것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수결은 구한말에 도장이 일반화되면서 점차 사라졌다.

원용석 (한국전각학연구회 이사)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