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에서는 이러한 의도가 상당히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중국에서 인장의 제작방법은 주로 금속을 이용한 주물을 사용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거의 위조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야금술이 점차 일반화되고 청동기와 철기의 사용이 늘어남에 따라 인장의 사용은 끝없이 위조라는 위협에 시달리며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글씨를 몰라 수결을 사용할 수 없었으므로, 자신의 손을 종이에 대고 그린 수촌(手寸)을 사용했다. 또한 중국과 한국 공통으로 이 수결을 인장처럼 새겨 문서의 끝에 찍기도 했는데, 이것을 화압인(花押印)이라고 한다. 특히 임금의 수결을 새긴 인장을 어압(御押)이라고 했다.
수결과 관련해 오성부원군 이항복의 일화가 전해진다. 이항복은 다른 획은 긋지 않고 단지 한일자(一)만을 그어 수결로 삼았다. 이항복은 관직이 높다보니 많은 문서를 수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 자기가 처리하지 않았는데 자기가 처리했다는 문서가 하나 있었다. 이항복은 수결을 가져오라고 했다. 담당자는 이항복이 수결했다고 하는데 자기는 수결하지 않았으니 다른 수결과 비교하려는 것이었다. 수결을 비교한 결과 다른 수결은 모두 획의 양쪽 끝에 바늘 구멍이 있었는데 그 문서에만 바늘구멍이 없었다. 이로써 진위는 밝혀졌으나 수결의 비밀이 드러나 오성대감은 수결을 새 것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수결은 구한말에 도장이 일반화되면서 점차 사라졌다.
원용석 (한국전각학연구회 이사)
원용석 (한국전각학연구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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