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 중의 하나가 ‘빨리 빨리’다. 한창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의견을 나누고 있는 중인데도 ‘빨리’라는 말을 말끝에 달아맨다. 말하는 이는 아무 의식도 없이 귀염성 있게 쏟아낸 말이지만 듣는 이로선 순간 숨이 턱하고 걸린다. 이 시대는 숙성을 위한 기다림이 무의미하다. 서둘러 진행해 빠른 결과를 창출해내는 것이 최고의 가치다. 이렇게 내몰리다간 죽음 직전까지 무작정 쫓겨 다닐 거란 슬픔이 울컥한다.

민화 전시관에 들르면 종종 세 마리 물고기 그림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소위 삼여도(三餘圖)라는 것이다. 그런데 물고기 세 마리를 그려놓고 삼어도(三魚圖)라 하지 않고 삼여도라 부른다. 한자를 풀어보면 세 가지 여유라는 말이다. 일단 물고기 세 마리가 여유롭게 헤엄치고 있다는 뜻일 거라고 대강 추측해버린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작품이 제법 세련돼 보이는데도 민화 장르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무명인에 의해 그려진 실용그림을 민화라고 칭한다. 민화는 궁중장식이 필요해 전문 화가들이 그린 궁중화나 사대부들이 고상하게 그려냈던 문인화와 구별된다. 그래서 민화는 서투른 솜씨로 서민적인 소재를 작품의 대상으로 삼았고 작가를 드러내는 낙관이 생략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재미있는 것은 정교하게 그렸든 윤곽만 어설프게 그렸든 물고기 세 마리를 그린 그림은 삼여도라 부르고 민화 장르에 포함시킨다는 사실이다.
모든 자료는 삼여도(三餘圖)가 <삼국지>의 왕숙전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설명한다.

“어떤 이가 동우에게 배움을 청하자, 책을 백 번만 읽으면 저절로 트인다고 했다. 그 사람이 도저히 책 읽을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하자 동우는 세 여유 시간이 있으면 된다고 했다. 그가 말한 세 여유 시간은 겨울, 밤, 비오는 날이었다. 겨울은 년(年)의 나머지 시간이고, 비오는 날은 월(月)의 나머지 시간이며, 밤은 하루(日)의 남은 시간이라고 했다.”

게다가 고기 어(魚)와 남을 여(餘)가 중국어로 발음하면 같기 때문에 동음이의어 놀이의 일환으로 삼여도(三餘圖)가 됐다는 설명을 한결같이 덧붙인다.
민화 치고 해석이 너무 길다. 민화는 서민들이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그림이다. 한자의 동음이의어를 뒤지고 그 속에 담겨진 유래를 찾아내는 건 궁중화나 문인화에 어울린다. 여기에는 궁중화나 문인화에 진입하지 못한 또 다른 그림들이 있다. 개나 고양이를 소재로 한 그림이다. 학이나 호랑이를 소재로 그린 그림들도 민화로 분류된다.

사대부의 고상한 그림 소재는 대부분 자연 풍광이거나 식물이다. 동물을 소재로 한 그림은 민화로 취급하거나 적어도 풍속화로 분류한다. 소위 문인화는 꽃이나 나무를 소재로 한다. 사대부 관심으로부터 밀려난 물고기는 쉼이 절실한 서민들의 방안 벽에 걸리게 됐다. 늘 쉬어도 먹고 살 수 있는 사대부들에게 물고기 그림은 사족(蛇足)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젠 삼여도(三餘圖)가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숨 가쁘게 매 순간을 살아가기에 정말로 쉼이 필요한 이들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그걸 바라보며 막힌 숨이라도 돌릴 수 있도록 눈에 잘 뜨이는 벽에 부적처럼 걸어두어야 한다. ‘빨리’의 폭력 속에서 ‘잠시’의 시간 짬을 확보해줘야 한다.

이정배 (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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