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이었던가? 아마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당시 유명 미술잡지에 납북 미술인들은 물론 미발굴 미술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명이 연달아 특집으로 실렸다. 어느 날 갓 출판돼 서점에 나온 그 잡지에서 놀라운 그림 한 점을 봤다. 제목이 <학살>이었다. 엄동 새벽 정수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고 젖은 손에 전기가 오른 것처럼 가슴 속이 서늘해지는 작품이었다.

4호(33*23.8cm) 크기의 소품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지네 대가리처럼 으스스하고 탁한 보름달이 음산하게 사위를 내려다보는 가운데 학살이 진행되고 있다. 끈적거리는 피와 납덩이 같이 무거운 습도가 더해져서일까. 괴괴한 밤기운은 어느 인물 하나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가만히 보니 더욱 기괴하다. 왜냐하면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이 모두 여성이기 때문이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달빛에 반사되는 차가운 금속성의 물체만이 시선을 강하게 잡아챈다. 두 여인은 이미 피가 낭자해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다. 그 여인들 사이에서 한 여인이 곧 닥칠 죽음에 넋이 물구나무를 선 듯하고 왼편의 여인은 아기를 업은 채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모습이다. 이 아비규환을 우리는 그저 구경꾼이 돼 우두망찰 지켜볼 수밖에 없다니!

이 그림을 그린 이는 이철이 화백이다. 당시엔 정말로 생소한 이름이었다. 아마 지금도 일반 시민은 물론 미술인들 태반이 이철이 화백을 모를 것이다. 반가운 건 이 화백이 강원도 횡성 출신이요, 춘천의 미술인(춘천고보 4회)이었다는 사실이다. 1930년 춘천고보 재학시절 제9회 선전(조선미술인전람회)에 당당히 입선하는 것을 시작으로 총 6회 입선해 강원미술의 초석을 다졌다. 1932년 일본으로 유학, 문화학원에서 수학했으며 재동경 한국인 유학생들의 모임인 백우회(白牛會)의 창립멤버, 신기회(新紀會), 그리고 1950년대 말 모더니즘 미학을 추구했던 신조형파에서의 활동 등 화가로서 굵직굵직한 경력을 쌓았다.

그러나 조국의 해방 뒤에 오히려 이 화백은 잊혀져버렸다. 그 이유는 화단의 표면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덩더쿵 하자마자 영험’이라고, 함량미달의 인사들까지 억적박적 엉겨 붙어 입에 침을 튀기며 신생조국의 미술판을 탁하게 해서였을까? 작가로서의 명성과 권위를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던 국전에 일절 참가하지 않고 오로지 교육자로서 조용히 일생을 보냈다. 더없이 절친했던 친구 변희천 화백과 제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철이 화백은 자기과시나 예술 외적인 사교로 자신을 절대 돋보이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철이 화백이 서울 대동중 미술교사 시절의 이야기다. 두 달에 한 번쯤 꼴로 허름한 복장의 사내가 찾아 와선 이 화백에게 돈을 받아갔다고 한다. 대신 그림들을 5~6점 정도 놓고 갔다고. 그런데 중학생들의 눈엔 그 그림들이 ‘데생도 색채도 엉터리인 싸구려 그림’으로 보여 던지고 발로 차며 장난으로 망가뜨렸다는 것.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허름했던 사내가 바로 박수근 화백이었다는 것! 허허 참, 예나 지금이나 중학생들은 무섭다. 아주 많이!

이광택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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