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는 벌써 석파령을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신연나루를 지나자마자 사공은 대바지마을(근화동 부근에 있던 자연부락)에서 자자고 청했으나, 재촉해 소양정 밑에 정박했다. 신연나루부터 소양정까지 많은 여울을 지나왔다. 소양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에 아올탄(阿兀灘)이 있었고, 대바지마을 서쪽에서 소리 내며 흐르는 곡장탄(曲匠灘) 주변은 흰모래가 눈부시게 빛났다. 노고탄(老姑灘)을 지나 맑고 깊은 물길로 몇 리를 올라가니 병벽탄(洴澼灘)이다. 노를 저을 수 없어 10여 명이 배를 끌어 올려야 했다. 때는 1823년 4월 18일. 소양정에서 놀이가 한창이다. 정약용은 <산행일기>에 그날의 일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일행이) 모두 소양정에 올라갔다. 이광수(李光壽)가 정중군(鄭中軍)과 현파총(玄把摠)을 이끌고 잔치를 열어 음악소리가 요란하다. 나는 꼼짝 않고 누워 참석하지 않고 말하기를, “소양정이 이제 예음정(曀陰亭)이 되었으니 오를 수 없다.”고 했다. 예조판서 이호민(李好敏) 또한 함흥과 영흥의 여러 무덤을 살피고 돌아오다가 춘천을 거쳐 홍천으로 가는 도중에 소양정에서 쉬는데, 나팔소리와 깃발의 모습이 자못 성대했다.
홀로 있는 정약용에게 나이 든 향리가 찾아와서 춘천은 망했다고 하소연 한다. 아전들은 모두 아귀같이 돈을 보면 삼키고 곡식 보면 마셔대기 때문에, 비록 선정을 베푸는 이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며, 어진 관리가 부임하더라도 벼슬을 버리고 돌아갈 것이라고 안타까워한다. “춘천은 우리나라의 성도(成都: 촉의 도읍지)여서, 국가에서 필히 보호해야 할 땅인데 지금 이와 같이 망가졌으니 아!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다시 불러들여 안정시키자면 6~7년 동안이 아니고는 안 될 것인데, 아침에 발령 내면 저녁에 옮기게 됐으니, 아! 이를 장차 어찌할 것인가?”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정자는 경관이 좋은 냇가나 강가, 또는 호수나 바다 등에 임하여 세워진 것들이 많다. 선인들은 정자에서 수양하고 배우며 인륜의 도를 가르치기도 했다. 마을사람들의 모임이나 각종 계의 모임을 가지기도 했다. 시인묵객들 뿐만 아니라 길손들이 휴식을 취하면서 흥취를 만끽했을 뿐만 아니라 산수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흥취를 즐기는 공간이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놀이를 위한 공간이기도 했으나, 정약용이 목격한 소양정의 잔치는 놀이의 정도를 벗어났다.

‘소양(昭陽)’은 ‘양(陽)을 밝힌다, 양(陽)을 나타나게 한다’ 등으로 풀이할 수 있다. 정약용이 목격한 소양정은 소양의 의미가 아닌, 정반대로 비쳐졌다. 그래서 음산할 ‘예(曀)’ 자와 그늘 ‘음(陰)’ 자를 써서 ‘예음정(曀陰亭)’이 됐다고 비판한 것이다. 과도한 잔치를 보고 황폐해진 정치를 듣는 정약용은 가슴이 아려왔다.
카페 ‘봉의산 가는 길’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선정비를 둘러본 후 소양정으로 향했다. 정약용이 오른 소양정은 지금의 소양1교 부근에 있었는데 전쟁을 겪은 후 봉의산으로 올라갔다. 숨이 찰 무렵 계단 위로 소양정이 보인다. 소양정에 오르니 유명한 시인들의 작품이 가득하다. 정약용의 시 <소양정에서 옛일을 회상하다[昭陽亭懷古]>를 천천히 읽었다.

어부 북한강 근원 찾아
춘천에 들어오니 漁子尋源入洞天
붉은 누각 나는 듯 만정봉(幔亭峰) 앞에 있네 朱樓飛出幔亭前
궁씨(弓氏) 유씨(劉氏)의
요새는 모두 없어졌으며
弓劉割據渾無跡
한(韓)과 맥(貊)과의 싸움은
끝내 가련하게 되었으나
韓貊交爭竟可憐
춘천 옛 땅엔 봄풀이 아스라하고
牛首古田春草遠
인제에서 흘러온 물엔
낙화가 어여쁘네 麟蹄流水落花姸
시를 깁으로 싸거나 소매로
터는 게 뭔 소용이랴 籠袖拂嗟何補
물가 버드나무에 해지는데
홀로 닻줄을 푸네 汀柳斜陽獨解船

정약용은 집안 혼사 때문에 춘천을 찾았지만 북한강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춘천에 오니 소양정이 봉의산 앞에 우뚝 섰다. 만정봉(幔亭峰)은 중국 무이산에 있는 봉우리로 봉의산을 뜻한다. 정약용은 예전 춘천 땅에 낙랑과 대방이 있었다고 보았는데, 유무(劉茂)와 궁준(弓遵)은 그곳의 태수였다. 이들은 북으로는 맥(貊), 남으로는 진한(辰韓)과 경계를 두고 싸웠다고 생각했다. 지금 춘천에 오니 옛 터에 봄풀만이 우거지고 강물엔 꽃잎이 떠서 내려오고 있다. 그야말로 시간의 덧없음이다. 소양정에 오르니 조선의 명사들이 지은 시가 즐비하다. 편액을 보호하느라 푸른 깁으로 싸 놓은 것도, 관기가 소매로 편액의 먼지를 터는 것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의미가 퇴색된다. 그렇다고 모든 것에 손을 놓을 수 없다. 다산은 춘천의 피폐함에 애석해 하면서 장차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그것에 대한 답변은 해는 지고 도와주는 사람이 없지만 닻줄을 푸는 것이다. 닻줄을 푸는 행위는 손을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구절은 장구한 역사 속에서 부질없는 행위로 보인다. 고독하지만 희망적이다.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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