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의산 아래 소양강변으로 향했다. 소양로와 후평동을 잇는 길은 늘 붐빈다. 질주하던 차들이 잠시 멈춘 틈을 타서 횡단보도를 건넜다. 자전거도로는 후평동을 향해 조금씩 길을 넓히고 있다. 나무 데크 위를 걸었다. 강 건너 성벽을 이룬 아파트가 호수로 변한 소양강에 일렁인다. 나루가 있었을 다리 위로 꼬리를 문 차량이 달린다. 정약용의 시를 꺼내 천천히 읽었다. 제목은 〈소양나루에서 두보의 수회도(水廻渡)시에 화답하다〉이다. 1820년에 지었으니 200여 년 전 작품이다.

소양1교

소와 말은 나룻가에 서 있고
牛馬立渡頭
모래톱의 물은 다시 잔잔해지네
沙水復平安
도읍에 가까워지자 풍경은
氣色近都邑
넓게 트이어 험난한 곳 없고
曠莽無險難
강이 둘러싼 정자 성대하며
江繞朱樓鬯
산이 머니 평평한 들 넓구나
山遠平蕪寬
부드러운 버들 나풀거리는데
便娟有柔態
거칠게 세찬 물결로 나가네
麤惡羞狂瀾


정약용은 의암댐을 지나며 “천지가 갑자기 환하게 넓어지니/ 아! 들 빛이 얼마나 웅장한지”라고 감탄한 바 있었다. 협곡을 통과하자마자 넓게 펼쳐진 춘천의 인상이 이러했다. 매월당 김시습은 “산은 첩첩 북쪽에서 굽어오고/ 강은 절로 서쪽으로 흐르네”라고 묘사했다. 봉의산 자락에 선 정약용은 눈에 들어온 우두벌을 “산이 머니 평평한 들 넓구나”라고 그린 후, 강가의 버드나무 하늘거리는데 배는 세찬 물결을 헤치고 우두동으로 향했다.

정약용은 춘천의 맥국설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그는 춘천이 맥국의 수도가 아니라 낙랑이 남하해 춘천으로 옮긴 후, 한(漢)나라의 관리가 파견돼 지키다가 토착민이 빼앗아 점령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맹자의 말에 ‘맥에는 오곡이 나지 못하고 오직 기장만이 난다’고 했는데 춘천이 그러한가? 《한서(漢書)》에 이르기를 ‘호맥(胡貊)의 땅에는 나무껍질이 세 치나 되고 얼음 두께가 6척이나 된다’고 했는데 춘천이 그러한가”라고 반문하며 자신의 논리를 펼쳤다. “흙의 성분 벼와 목화에 알맞아/ 예부터 굶주림과 추위 없었네”라고 시는 이어진다. 우두벌 때문에 춘천 사람들은 굶주림에서 벗어났다고 본 것이다. 이중환은 강을 끼고 있는 마을 가운데 가장 살기 좋은 곳 중의 하나로 우두벌을 꼽았다. “우두촌(牛頭村)은 들판이 멀리 펼쳐져서 시원하고 명랑하다. 또 강 하류로 배가 드나들어서 생선과 소금을 교역하기가 편리하다.” 《택리지》는 이렇게 적었다.

선경의 물 설악에 이르렀다가
仙源抵雪嶽
수없이 구비 치고 돌며 오는데
到此九折盤
내가 들으니 산삼 씻은 물은
吾聞洗蔘水
진액을 마르지 않게 한다던데
不令津液乾
오매불망 오색약수를
寤寐五色泉
어떻게 한 번 마셔 볼거나
何由得一餐


정약용은 북한강에 대한 종합보고서인 《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에서 소양강의 발원지가 두 곳이라고 보았다. 오대산에서 나와 기린을 지나는 내린천이 하나고, 한계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나머지 하나다. 한계산은 설악산의 일부로 안산이 있는 서북주릉을 말한다. 소양강은 두 물이 인제 합강정 아래서 만나 수없이 굽이치면서 춘천을 향해 흘러온 것이다. 설악산을 경유해 온 소양강물을 보고 정약용은 오색약수를 떠올린다. 건강염려증 때문이 아니라 지적 호기심 혹은 과시 때문인 것 같다. 소양나루를 건너며 “나의 재주 세상과 서로 맞지 못하니/ 괴롭게 소금 수레 끌고 태행산에 올라가네/ 큰 박은 너무 커서 쓸 수 없으니/ 이상향에 심는 것이 좋으리라”라고 고뇌했던 김시습과 다른 모습이다. 18년의 유배생활이 그를 번민과 회한에서 달관과 무심의 경지로 이끌었을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본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 시를 읽는 내내 서운했다. 강물은 저리 일렁거리고 해는 뉘엿뉘엿 지는데.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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