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평사를 유람한 정약용은 돌아오는 길에 우두동에 들러 하룻밤을 보낸다. 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을 보고 감회가 일어 〈우수주(牛首州)에서 두보의 성도부(成都府)에 화답하다〉란 시를 짓는다. 1820년의 일이다.

우두동 어디서 유숙했을까? 소양1교를 건너면서부터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짐작하기 어렵다. 햇살에 은행잎이 노랗게 낙하하는 길은 우두산 쪽으로 이어진다. 차도에서 벗어나 농로로 들어섰다. 추수를 마친 논에 볏단이 누워있고, 밭은 온통 햇살에 하얗게 빛나는 비닐하우스다. 올해 토마토 농사는 끝난 것 같다. 대신 부추가 푸르게 자라고 있다. 정약용은 “흙의 성분 벼와 목화에 알맞아 / 예부터 굶주림과 추위 없었네”라고 〈소양나루에서 두보의 수회도(水廻渡)시에 화답하다〉에서 읊조렸는데 우두벌 한가운데 서니 머리가 끄떡여진다.

저녁에 우수촌에서 잤는데 暮宿牛首村
자세히 사방을 살펴보니 顧瞻詳四方
아, 이 낙랑성(樂浪城)을 嗟玆樂浪城
맥향(貊鄕)이라 잘못 부르지만 冒名云貊鄕
나무껍질은 일 촌도 되지 않고 木皮不能寸
오곡은 밭둑에 연이어 자라네 五穀連阡長
날씨 포근하여 빨리 움트니 地暄發生早
초여름에 나뭇잎 이미 푸르며 首夏葉已蒼
뻐꾸기는 나무마다 울어대고 鳲鳩樹樹喧
꾀꼬리 유연한 가락으로 연주하네 黃鳥弄柔簧


다산은 춘천의 맥국설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춘천은 맥국이 아니다”로 시작하는 ‘맥국에 대한 변증[貊辨]’에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춘천이 맥국의 수도가 아니라 낙랑이 남하해 춘천으로 옮긴 후, 중국의 관리가 파견돼 지켰다고 보았다. 맹자에 “맥에는 오곡이 나지 못하고 오직 기장만이 난다”고 한 대목과 《한서(漢書)》에 “호맥(胡貊)의 땅에는 나무껍질이 세 치나 되고 얼음 두께가 6척이나 된다”고 언급한 것을 인용하며 춘천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들판은 따뜻하며 비옥했다.

옛날 신라왕이 순행하고부터 南韓昔巡撫
중국 사신 건너던 다리 없어졌고 漢使川無梁
비석마저 오래도록 묻혀 버려서 勒石久埋沒
높은 명성이 끝내 아득해졌네 薰聲竟微茫


《한서》를 보면 한무제가 “팽오를 시켜 창해군을 설치하고, 팽오를 시켜 길을 뚫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엔 “단군이 팽오를 시켜 국내 산천을 다스려 백성들의 살림을 높였다”고 하며, “우수주에 팽오비가 있다”는 대목도 있다. 팽오가 길을 내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퍼져서 후대 사람들의 작품 속에 등장하곤 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유득공(柳得恭)은 “통도비석은 깨어져서 가시덤불 속에 매몰되었네”라 했고, 신위(申緯)는 “지금도 통도비 세운 팽오를 기억하네”라 읊조렸다. 시비와 진위를 떠나 우두벌은 유구한 역사의 현장이었고, 춘천을 찾은 시인들은 우두벌 한가운데 서서 시를 지었다. 지금 우두벌은 아파트가 잠식하는 중이고 더 이상 우두벌을 노래하지 않는다. 다산 시의 마지막 구절은 오늘을 예언한 것 같다. “우리나라 역사 그 누가 읽으랴 /올라와 보니 슬프기 그지없네.”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