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과 금병의숙

금병의숙은 우리 지역 출신 소설가 김유정(1908∼1937)이 야학 등 농민운동을 벌이던 곳이 다. 금병복지회관과 증1리 경로당 현판이 함께 있는 건물이 금병의숙 터가 있던 자리다. 이곳도 자리를 한 번 옮긴 후 자리 잡은 곳이라고 한다.

김유정은 휘문고를 나와 1930년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잦은 결석으로 인해 제적당하자 고향 실레마을로 내려오게 된다. 이후 김유정은 금병의숙을 통해 농민들에게 배움의 갈증을 풀어주며 농민운동에 힘쓴다.

7살에 어머니, 9살에 아버지를 여읜 김유정은 어려서부터 깊은 상실감을 경험했다. 또 연희전문 당시 최고의 명창 박녹주에게 구애를 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젊은 김유정의 좌절감은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금병의숙 터 바로 옆에 자리 잡은 느티나무는 이런 김유정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느티나무속이 텅 비어 있다.

느티나무가 만들어 주는 그늘 안에는 정자가 자리 잡고 있다. 동네 주민들의 쉼터인 정자에서 어르신들이 금병의숙에 대해 말문을 연다. “우리 동네는 다 금병의숙이여.” 그도 그럴 것이 도로명 주소로 바뀌면서 동네 주택의 주소가 모두 ‘금병의숙로 000’으로 시작된다.
느티나무는 둘레가 3m, 높이는 15m 정도다.

금병의숙은 김유정이 농민들에게 선생님으로 불리던 장소인데, 그 이름은 금병산에서 유래했다.

임진왜란·을미의병·정미의병 역사 간직한 진병산

금병산(652.2m)은 김유정역과 가깝고 교통이 편리해 수도권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는 산이다. 많은 사람들이 금병산을 찾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는 모르고 지나치기 쉽다. 첫째는 금병산의 잊혀진 이름이 진병산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생강나무가 김유정의 동백꽃이라는 사실이다. 금병산은 춘천시내를 비단 병풍처럼 두른 모습이라 이름 지어졌다고 하지만 옛날 병사들이 진을 쳤던 산이라고 하여 진병산이라 불렸다.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당시 강원도 조방장(중앙에서 파견된 장수직책) 원호 장군이 이 일대에서 왜군과 혈전을 펼쳐 진병산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그 후 19세기말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 될 때 항일 의병들이 이 일대에서 진을 구축하면서 진병산이란 이름이 더 각인됐다. 을미(1895년)의병장 이소응, 이진응, 유홍석, 홍재구 등의 춘천지역 의병들이 이곳을 왕래 했다. 또한 정미의병 때는 1907년 8월에 가정리 출신 유홍석, 유영석, 유제곤과 수동리 출신 박선명 등 600여명의 의병이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12월 도연합의병의 서울 진격작전 중 이곳에서 또 다시 진을 치며 혈전을 펼쳤다. 진병산 자락은 오랜 역사 속에서 항일의 흔적이 남아있는 전적지다.

김남덕 (강원사진연구소장)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