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은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손끝 재간이 아니라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열흘쯤 전, 춘천문화예술회관에 마련된 고 박희선 선배의 작품 앞에서 느낀 단상이다. 마침 올해가 강원민족미술인협회를 창립한 지 꼭 10주년이 되는 해인지라 그 기념전과 함께 조촐하나마 선배의 유작들을 한자리에 모았던 전시였다.

지옥의 바닥을 끄는 쇠사슬 소리가 그럴까. 서울 종로구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삼청공원 쪽으로 한참을 올라간 한옥. 창호지 한 장 너머의 포장길로 탱크의 캐터필러 소리가 시민의 영혼과 몸을 깔아버리겠다는 듯 ‘우릉우릉’ 지나다니곤 했다. 어디 그뿐인가. 사직공원 방향에서는 ‘탕탕, 드르르륵’ 하는 음산한 총성이 밤의 정적을 찢어발기듯 울리곤 했다. 그때가 10.26과 12.12사태 직후인 1980년 2월 말. 희선 선배와의 하숙은 그렇게 시작됐다. 만으로 열아홉의 예비대학 1학년생과 곧 4학년이 되는 선배였는데, 바로 몇 달 뒤 터진 광주민주화투쟁의 여파로 학교에 휴교령이 내리는 바람에 고만 우리들의 하숙생활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사랑도 그렇지만 배움 또한 시간의 길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게 맞다. 니콜 키드먼이 주연한 영화 <콜드 마운틴>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하는 말이 인상적이지 않던가.

“나는 네 엄마랑 고작 22개월 살았지만 그걸로 평생을 버티기에 충분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만의 필살기인 <수사학>을 열아홉이나 스무 살에 집필했다지만, 당시 나는 지성의 키가 형편없이 낮았던 시골뜨기요, 숫보기(순진하고 어수룩한 사람)에 불과했다. 게다가 시대는 하루가 다르게 먹구름 짙고 벼락이 내리치는, 그야말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거대한 함선 같았다. ‘서울의 봄’은 ‘도둑처럼’ 왔던 것이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유신헌법만이 우리가 살 길”이라고 고교 정치경제 선생님은 힘주어 강조했었는데! 어찌나 혼란스럽던지 나 홀로 흙바닥에 직립할 수조차 없을 것 같았다.

선배를 만난 건 그래서 행운이었다. 청맹과니의 지팡이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달변은 아니었어도 뜸뜸한 말마디 끝에 알심이 박혀 있었다. 마치 산에서 캐낸 바위처럼 듬직하고 떡갈나무처럼 단단한 몸체에서 강기(剛氣: 굳센 기상)가 뿜어져 나왔다. 세상일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진짜로 종요로운 건 그 아는 일에 대해 어떤 인식, 어떤 신념을 보이느냐 하는 의식의 문제였다.

거침없이 선배는 그 인식과 신념을 몰아붙였다. 이십대 중반의 나이 때 보이는 그 흔한 방황과 갈등조차 없었다. 타고난 민족주의자였다. 직심스럽게 창작에 몰두했다. 마치 조각배를 탄 채 거센 너울 일렁이는 바다와 사투하는 늙은 어부 같았다. 당사주 그림책처럼 너덜너덜해진 시대 한복판에서, 굵은 장작을 단번에 쪼개버리는 도끼날처럼 서늘했다.

그것은 한국성 탐구였다. 평시 좋아했던 <한오백년> 노래와 강원도의 산처럼 우직스럽게 한반도의 역사와 정치사회 현실의 실존을 조각으로 표현했다. 송곳으로 두꺼운 책을 뚫듯 상징과 은유의 걸고 푸진 잔치였다. 그리고 그 궁극은 씨알(민중)들의 생명이었다.

역시 그렇다. ‘인생은 오래 살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얼마만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았느냐가 문제’이겠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기 중.

전시장을 떠나면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나온 한마디가 전 세계보다 무겁다!”

이광택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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