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를 그리며 자유를 꿈꾸는 화가 정현우

지난 16일 정현우 화가의 양구 작업실을 찾았다. 작품과 화구들이 가득한 화가의 작업 공간은 그 자체로 화가의 삶을 담은 그림이면서 빈 캔버스였다. 화가의 인생과 작품에 담긴 이야기를 들어봤다.

작가는 양구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다니고 고향을 떠났다. 고향으로 돌아와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이 있는가?
갈 곳이 없었다. 춘천에 있다가 춘천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생겼다. 만만한 게 고향 아니겠는가? 하지만 고향은 불편한 게 더 많다. 사람들이 내 과거를 적나라하게 알고 있는 곳이다. 중학교까지 여기 양구에서 다녔는데 나는 중학교 시절 불량학생이었다. 아직도 친구들은 나를 불량학생으로 기억한다. “쟤가 무슨 그림을 그려”하는 식이다. 고향에서 인정받는 건 쉽지 않다. 어쨌건 고향의 포용 덕인지 고향에 들어온 후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새를 날리는 아이

작업실이 박수근미술관과 지척이다. 박수근과 어떤 인연이고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지금 있는 이곳은 박수근미술관에서 운영하는 작업실이다. 1년 계약이었는데, 딱히 갈 데도 없고 해서 눌러앉았다. 박수근 화백이 없었으면 양구에 이런 스튜디오가 있을 수 있었겠는가? 선배를 잘 둔 거다.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박수근 화백은 내게 그림을 그리게 한 사람이다. 박수근은 나보다 가방끈이 더 짧은 사람이다. 내게 큰 용기를 준 고향 선배다.

고향에 다시 돌아와 지난 시간을 회상해 보면 무엇이 남았나?

한 곳에 6년씩이나 있어본 건 처음이다. 보통은 2~3년씩 머물렀다. 춘천을 베이스캠프 삼아 떠돌았던 셈이다. 나이가 드니 역마살도 잦아드는 것 같다. 떠돌았던 시절을 돌아보면 어찌 그리 무방비로 살았나 싶기도 하다. 고생이었지만 나름 자유를 지키며 살려고 애썼다.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고 간섭 없이 살 수 있다는 건 예술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1997년에 데뷔해 지금까지 14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언제부터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는가?

막연히 예술에 대한 동경을 갖게 된 것은 중학교 시절이다. 서울 사는 친척 형이 방학 때 양구에 왔는데 미술학도였다. 멋있어 보였다. 내가 처음 느꼈던 예술의 아우라였다. 그 영향으로 고등학교 다닐 때 미술부에 들어갔다. 반복연습으로 얻는 건 기술이지 예술이 아니라며 데생을 거부해 쫓겨났다. 군대시절엔 엄청 괴롭히는 상관의 마음을 그림으로 돌려놓은 적이 있다. 그림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확신을 갖게 된 계기였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 건 사업이 망하고 나서였다. 돈 벌긴 글렀고 하고 싶은 거나 한 번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1995년 ‘풀잎’이라는 동인 시집에 처음 시를 발표하고, 그 뒤로 시화집과 산문집을 여러 권 냈다. 그림을 그리면서 글도 쓰는 사연이 궁금하다.

시를 먼저 시작했지만 주업은 그림이다. 시는 아무리 잘 써도 먹고 살기가 힘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림을 추가했다. 하나만 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하나를 잘하는 것보다 좀 못하더라도 여러 가지를 해보고 싶었다. 시는 한 시절 내게 구원이었다. 예술뿐만 아니라 어떤 한 분야에 깊이 빠져있는 사람은 그 몰입 자체가 구원일 것이다. 포기 안하고 끝까지 살아가게 하는 뭔가가 있다면 그게 구원이지 구원이 따로 있겠는가?

화가는 나무와 새와 구름 같은 지상의 풍경들을 그렸고, 아버지와 엄마 같은 기억속의 인물들을 그렸다. 전시할 때마다 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크게 변한 것은 없다. 그동안 많이 천착했던 소재는 유년의 기억이다. 타임머신을 탈 수 있다면 누구나 가장 먼저 유년시절로 가지 않을까 싶다. 나처럼 강원도 산골에서 자연과 함께 자란 사람들의 향수는 특히 강할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데뷔해서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작품 활동을 이어오는데 원천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특정해서 말하기가 어렵다. 책, 음악, 영화, 산책, 연애 등 일상의 모든 것이 원천이겠지만 그중 음악의 힘이 큰 것 같다. 좋은 음악은 자극이 된다. 음악이 예술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장르가 아닐까 싶다. ‘모든 예술은 음악적 상태를 동경한다’라는 월터 페이트의 말에 공감한다.

작품을 보면 마티에르가 두텁다. 화가가 살았던 시간의 두께들이 대상들과 조응하는 걸로 보인다. 화가의 작품들은 세상과 어떻게 조응하는가?

그림에서 어떤 메시지를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생계형 화가다. 거실에 걸 수 있는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다. 굳이 메시지가 뭐냐고 묻는다면 ‘오래된 미래’라고 말하겠다. 인류도 살고 지구도 살려면 문명을 어느 시점으로 되돌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내년에는 그림엽서로 책을 낼 생각이다. 여행도 할 수 있는, 덜 바쁜 한 해였으면 좋겠다.

화가는 내년에 작업할 작품들이라며 새 그림 두 점을 보여준다. 그는 여전히 자유를 꿈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림 속의 새들은 하나같이 양 날개를 활짝 펴고 있었다. 화가의 마음일 것이다. 정현우 화가는 12월 1일부터 2주간 서울 서초1동 규영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한다. 15번째 개인전이다.

박미숙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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