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호 감독의 ‘다른 길’

팔봉산 자락, 부모의 농사일을 돕는 게 고돼 노는 날보다 학교 가는 날을, 방학보다 개학날을 더 손꼽아 기다렸던 소년은 춘천의 고등학교로 유학을 왔다. 그러나 그 시절, 고질적인 두통과 허무함이 소년의 마음과 몸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 고통은 까닭 없이 깊어갔다. 무엇에도 의미를 둘 수 없는 나날도 계속됐다. 살 의미도 없었지만, 죽을 의미도 찾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영화 한 편에, 비로소 그에게도 ‘바람’이 생겼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 로버트 레드포드와 메릴 스트립의 서정적인 사랑 이야기, 광활한 아프리카의 풍경, 음악… 소년은 영화감독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2학년 교실, 친구들 앞에서 ‘감동의 오르가즘’을 느끼게 하는 감독이 되겠다며 당돌한 포부를 밝혔던 소년은 그로부터 15년 후, 첫 작품 <피터팬의 공식>으로 선댄스영화제에 초정을 받아 로버트 레드포드를 만난다. 소년의 오만한 선언은 현실이 됐다. 조창호(45) 감독. 그가 1월, 춘천 올로케이션으로 찍은 영화 <다른 길이 있다>로 우리 곁을 다시 찾았다.

사진=김애경 기자

조창호 감독 필모그래피
2005년 첫 장편 <피터팬의 공식>으로 도빌 아시아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을 비롯해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후보 등 다수 영화제 초청
2010년 <폭풍전야> 제 45회 카를로비바리국제영화제 다른시선 부문 후보
2016년 <다른 길이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상하이국제영화제, 브졸국제아시아영화제 초청

영화를 만든 것이 2015년 이었는데 개봉이 늦어졌다. 감독으로서는 작품을 빨리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텐데….

이번 영화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제작부터 연출까지 내가 모두 관여해야 해서 버거운 것도 있었고, 내 영화처럼 상업성이 낮은 영화들이 설 자리가 많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춘천에는 3개의 단관극장이 있어 <간디>, <지옥의 묵시록>, <정복자 펠레> 같은 예술성 높은 영화들을 모두 이들 극장에서 볼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과연 볼 수 있었을까 싶다. 현재 우리나라 영화계는 CJ나 롯데 같은 대기업이 투자와 제작뿐 아니라 배급처인 극장을 가지고 있다. 멀티플렉스 시대에 1개의 극장이 10개 넘는 스크린을 가지고 있어서 한 곳에서 다양한 선택이 보장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돈이 되는 한두 영화가 80%를 차지하고 나머지 영화들이 20%의 스크린을 나눠 갖는 셈이다. 극장주 입장에서는 다양성영화(예술, 독립영화, 다큐 영화 등 비상업영화)는 돈이 안 되니까 상업영화만 배급하게 되는 거고, 다양성영화 관갠들 입장에서는 선택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이 영화의 상영을 결정해준 춘천 명동CGV측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관객을 담보할 수 있는 상업영화 대신 다양성영화에 할애를 하는 일은 특별한 의지가 필요한 일이다. 춘천에 다양성영화 전용관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개봉까지 이런 구조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다른 어려움이 많았다고 들었다.

이번 영화는 정말 많은 분들에게 빚을 졌다. 여러 계획이 틀어지면서 제작비도 빠듯했고, 영화가 완성돼 상영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내가 감당해야 했기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어디선가 나타나 나를 돕는 분들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각 극장 환경에 맞춰 화면의 조건을 최적화시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일이었다. 크리스마스는 물론이고 연말연시를 모두 밤샘하며 작업실에서 보냈다. 그 귀한 시간을 한국 최고의 전문가들이 붙어주었다. 함께 마지막 작업을 한 스태프들이 몇 년만에 작업한 최고의 영화라고 말해주었을 때 정말 기분이 좋았다.

전작 <피터팬의 공식>, <폭풍전야>, 그리고 이번 영화까지 조 감독의 영화에는 유독 자살 시도가 많이 등장한다.

삶이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질문을 쫓아가다 보면 어느새 죽음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닿게 되더라. 결국 삶이란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달려있다고 본다. <폭풍전야>의 경우 허무의 끝에서 이들이 가장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죽음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선택을 하는데 누구도 ‘왜 죽지’하고 시비를 걸 수 없다고 생각할 만큼의 끝자락에 서 있는 두 사람을 그렸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는 조금 달랐다. 수완과 정원이 서로 동반자살의 파트너라는 것을 모른 채 하룻밤을 보내고 수완이 제안을 한다. 중도선착장에서 2시에 만나자고. 그 시간은 닉네임 ‘검은새’, ‘흰새’로서 둘이 자살을 하기로 한 시간이다. 죽음의 장소인 ‘누에섬’과 삶의 장소인 ‘중도선착장’. 이 둘은 과연 어디에서 만날까.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어떤 선택에 더 마음을 보탤까도 중요한 질문의 하나다.

대체로 혼자 극복하기 어려운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다른 길이 없으니까. 자살은 그 개인의 아픔을 공유할 그 누구도 없을 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들은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우연히 서로를 발견한 거다. 적어도 혼자서 극복할 수 없는 아픔을 공유할 최소한의 한 명이 생긴 거다. 이것이 바로 ‘다른 길’의 시작이라고 봤다.

<다른 길이 있다>를 기획하게 된 데는 하나의 사건이 동기가 됐다. 그와 내가 살고 있는 춘천에서 언젠가 동반자살 사건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어쩌다가... 쯔쯧’하며 잊어갔을 그 사건에서 감독은 몸과 마음이 멈추었다. 죽음의 목전에서 머뭇거리는 동안, 자신과 그들이 스치는 일은 없었을까. 그들이 멈춘 차 앞을 지나갔을 수도 있고(영화에서는 수완에게 동반자살자들임을 암시하는 차량이 멈춰 길을 물었다),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면서 스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사람과 사람의 스침이 아무런 위안도 되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우울한 시간을 보내던 중, 그는 스스로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들에게 작고 사소하지만 따뜻한 공감의 시선을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영화 <다른길이 있다>를 한 줄로 정리한다면?

내 나름대로 이 영화를 한 줄로 정리한다면 ‘검은새, 흰새의 어두운 공모, 수완과 정원의 밝은 연대’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이 어두운 세상에 진정한 밝은 연대가 가능할까. 조 감독은 최근 촛불집회에 참여했다가 가슴 뭉클했던 기억을 더듬는다.

촛불 집회에서 행진을 하는데 우리 막내가 키가 작으니까 앞 사람의 엉덩이만 보고 가야 했다. 그래서 무등을 태워 올려주고 앞을 보는데, 문득 건너편 아파트에서 누군가 플래시를 크게 흔들고 있었다. 그때 내 영화에서 수완의 전 여자친구 혜미가 얼음 위를 건너면서 멀리서 휴대폰 불빛을 흔들어 보여주었던 것이 떠오르면서 갑자기 뭉클해졌다. ‘아, 우리만이 아니라 저기 멀리서도 함께 하는 이들이 있구나…. 나와 누군가가 저렇게 연결되어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다시 뭉클함이 올라오는지 조 감독의 코끝이 붉어진다. 그의 영화 <다른 길이 있다>는 착한 영화다. 곧 포기할 듯한 위태로운 절망의 시선을 포착하고, 그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민다. 다시 춘천의 겨울이 한창이다. 영화 속 겨울과 모든 장면이 겹친다. 영화는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수완과 정원이 서로의 상처를 알아챘듯이, 이제 세상의 약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우리가 위로의 손짓을 할 때라고… 이 영화의 진정한 엔딩신은 현실 세계에서 서로가 고통을 알아채주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되어줌으로써 완성되는 게 아닐까?

추신: 춘천시민들을 위해 특별히 감사의 뜻으로 20인 이상 단체관람이나 기관에서 감독과의 대화를 청하면 언제든 응하겠다고 한다. 영화사 대표메일 mohmpictures@gmail.com으로 신청하면 된다. 영화는 19일부터 춘천명동CGV에서 개봉된다.

 

 

 

허소영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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