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랜드라는 테마파크가 들어선다는 춘천 중도 유적지 조사에서 고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가 출토됐다.

유적과 유물 보존을 위해 개발을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과 춘천의 관광산업 강화와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예정대로 추진돼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며 논란이 뜨겁다.

돌을 연마해 뗀석기보다 고른 날을 유지하는 도구로 만들어 쓰던 신석기 사람들에게 강하고, 날카롭고, 형상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강점을 가진 청동기는 신세계와 같았을 것이다. 이는 단순한 감동을 넘어 충격적이고도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사실 간석기는 수작업의 끝판왕이다. 돌을 돌에 갈아 매끄럽고 날카로운 석기를 만드는 것은 인간에게 부단한 고통과 인내를 요구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청동기의 제작이 쉬웠을 리 없다.

청동 대야

청동기의 주성분인 구리는 금속이므로 채굴하고, 암석에서 떼어내 부수고, 녹여서 틀에 부어야 했으니 그 기술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부드러워 끝이 잘 문드러지는 구리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높은 온도에서는 쉽게 기화되는 주석과 합금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인류는 이것을 끝내 해결했으니 기능의 시대에서 과학기술의 시대로 넘어와 최고급의 문화를 이루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청동기 초기에 일반인들은 청동문화에 접근하기가 대단히 어려웠기 때문에 청동기는 대단히 고급스럽고 귀한 대접을 받으며 지배와 권력의 상징으로 지배자들의 전유물이 됐던 것이다.중국에는 기원전 1천년 이전 국가의 중대사가 있을 때 통치자의 명령으로 만들었던 세 발 달린 솥을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청동기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중 그 기물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나 사연을 직접 청동기에 주물로 넣은 것들이 있다. 이는 갑골문보다 훨씬 더 발전된 형태의 문자인데, 이것을 총칭해 금속에 새긴 문자라고 해서 ‘금문(金文)이라 한다.

인장의 발달은 이 청동기의 발전과 궤를 함께 한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은나라 수도였던 은허의 유물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3개의 청동 인장을 수습했다. 이는 중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장이며, 이미 은나라에서 청동으로 인장을 만들어 사용했다는 증거다. 은으로부터 시작돼 주나라 시대에는 다양한 청동 인장이 만들어졌고, 이것이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각국에서 점차 관제로 정착하게 됐다. 그러나 각국의 인장에 대한 제도는 제각각이었으며, 진의 시황제가 인장의 제도를 확립하면서 전국에 일괄적으로 적용했다[秦印(진인)]. 이후 한나라는 진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았으며[漢印(한인)], 이것이 이어져 국새(國璽)와 인장(印章), 그리고 전각예술이라는 동양의 중요한 제도와 전통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원용석 (한국전각학연구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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