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재 이소응(1852∼1930)은 국가보훈처와 광복회·독립기념관이 선정한 ‘1월의 독립운동가’다.

19세기 조선은 외세로부터 개방의 압력과 체제모순으로 인해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서세동점(西勢東漸)하던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제국주의 깡패 칼잡이에게 무참하게 시해되는 사건과 유교문화의 상징이며 선비의 자존심이었던 상투를 자르는 단발령(斷髮令) 사건이 일어났다.

습재 이소응은 의암 류인석과 함께 화서학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습재는 1852년 8월 7일 춘천 남산면 강촌리에서 태어나 화서 이항로의 고제였던 성재 류중교에게 의암 류인석, 항와 류중악 등과 함께 학문을 전수받았다. 성재 류중교는 1882년부터 1889년까지 춘천 가정리에 머물며 가정서사를 설립하고 이를 운영하며 춘추대의에 입각한 위정척사 교육에 집중했다. 위정척사란 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내친다는 뜻으로, 바른 것은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정신적 가치관이고, 사악한 것은 서양의 선진적 물질문명의 이기(利器)를 의미한다. 이는 물질보다는 정신이 우위에 있다는 문화적 우월에 기반을 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1895년에 일어난 을미의병에서 습재 이소응을 의병장으로 하는 춘천의병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새로 부임하는 친일관찰사 조인승을 잡아다 처형한 사건은 그 당시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이는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게 하는 도화선이 되었으며, 서울로 진공작전을 펼쳐 그 세를 천여명 이상으로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화력의 열세와 조직력의 약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퇴했다. 습재는 지평의 맹영재에게 지원요청을 하고자 떠나며 종형이었던 직헌 이진응에게 의진을 맡겼으나, 직헌은 약사현 전투에서 패하고 의진에서 순직하기에 이른다. 이후 직헌의 동생 이민응이 춘천의진을 이끌다가 강릉의진에 합류하면서 일단락되기에 이른다.

춘천의병장을 지낸 이후로 습재를 비롯한 종형제는 모두 춘천을 떠나 제천을 중심으로 1900년에서 1911년 초까지 교육과 구국활동을 벌이다 중국 봉천성 회인현으로 망명해 1930년 봉천성 민가둔에서 사망하기까지 스승의 문집 발간과 구국활동을 했다.

습재는 춘천의병장을 지낸 이후로는 스승의 학문을 전수하고 스승의 문집을 편찬하는 일을 평생 사업으로 삼았다. 일제가 주인이 된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 민적에 들지 않고 의암 류인석을 스승으로 섬겨 화서학파의 학맥과 적통을 이은 대학자다.

습재는 을미의병 당시 춘천의병장으로서 의암 류인석과 동문수학한 평생지기이자 스승과 제자관계이기도 하다. 습재는 구한말 춘천을 대표하는 을미의병대장이었고, 화서학파의 위정척사에 기반을 둔 춘추대의를 평생 실천한 지행합일의 대학자였다. 습재는 물질만능으로 점철되어가는 현 시대에 정신적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지나간 행적을 통해 암묵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이점이 우리가 춘천의병장 습재 이소응을 배워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허준구 (춘천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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