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자 교사 김재룡의 삶의 이야기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옹진 출신의 열여섯 살 소년병이 있었다. 그 소년병은 전쟁의 와중에 반공포로가 됐다. 몇 해가 지난 후 청년이 된 소년은 결혼을 했다. 아들이 태어난 뒤 6개월만에 그는 다시 군에 입대한다. 그리고 1년 정도 지난 뒤인 어느 겨울, 그는 누군가 등 뒤에서 쏜 총에 왼쪽 어깨 아래를 관통당하는 총상을 입고, 후송병원으로 옮겨진 지 38일만에 사망한다. 1959년 1월 3일의 일이었다. 그에게는 아내와 어린 아들이 있었지만 군에서는 사망 1주일 전까지 이런 사실을 통보하지 않았다. 군에서는 사망하자마자 다음날 연락도 없이 화장을 하고 1년 뒤 국립묘지에 유골을 묻었다. 그리고 10년이 돼서야 순직했다는 통보를 했다. 김화에 있는 6사단 7연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화천고에서 체육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김재룡 시인. 

그때 태어나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한 그 아들은 올해 환갑이다. 시인이자 체육교사인 김재룡(60) 씨의 삶은 그렇게 시작됐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인 2014년, 아들은 아버지의 병상일지를 찾았다. 병상일지와 당시 아버지의 동료들의 증언을 통해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됐다. 마주하기 어려운 진실 앞에 선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사람이 죽었으면 연락을 해야죠. 가족이 있잖아요. 화장할 때도 연락이 없었대요. 어머니는 생계 때문에 보따리 행상도 하고, 결국 재혼을 하죠. 살 수가 없으니까. 아버지뿐 아니라 어머니까지 완전히 버려진 겁니다. 그런데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있던 해에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고광헌 선생님이 병상일지를 찾으라고 조언을 해주셨죠. 결국 찾았어요. 통보를 받고 직접 계룡대에 찾아가 사망진단서 등 27쪽짜리 진료기록부를 받았어요. 56년만에요. 그걸 보니 퍼즐이 맞춰지더군요. 세월호에 비길 건 아니지만 세월호 유족들처럼 국가는 어머니에게 애도의 기회를 주지 않았어요. 죽음도 왜곡했죠. 화장을 한 다음 어떻게 어머니에게 연락이 왔나 봐요. 스물셋 새댁이 아들을 업고 갔는데 유골을 받을 수 있겠어요? 호미로 묻을 수도 없고. 애가 크면 찾으러 올 거라고, 잘 간수해 달라고 했다는데 1년쯤 뒤에 국립묘지에 묻었대요. 국립묘지에 ‘유기’한 거죠. 총상을 입고 사망했는데 사망진단서에는 ‘병사’로 돼 있더군요. 1997년인가 증언을 들었어요. 당시 함께 복무했던 동료로부터. 상관이 쏜 총에 맞았다는 거죠. 끔찍한 겁니다. 어느 구술사 발표에서 일기형식으로 썼어요. ‘길가에 버려지다’라는 제목으로. 쌍용차, 밀양, 강정마을, 용산참사, 세월호…. 이 모두가 국가에 의해 버려진 사람들입니다. 지금 광장에서 촛불을 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죠. 버려진 사람들이에요. 그들이 촛불을 든 것입니다.

전형적인 군의문사 사건이었다. 누군가의 총기 발사로 인해 사망했지만 사인은 병사(病死). 물대포에 의해 사망했지만 병사로 처리된 고 백남기 선생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재혼을 했다지만 삶이 간단치 않았을 것임은 분명할 터. 성장과정이 궁금했다. 그리고 춘천으로는 어떻게 오게 됐는지….

제가 태어난 곳은 미군들이 득실대던 경기도 양주군 남면 구암리였어요. 2002년 효순이와 미선이가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효촌리가 지척인 곳이죠. 의정부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원호자녀로서 국가의 도움을 받았어요. 중 2때까지 다니다 서울 정릉으로 이사를 나와 덕수중학교를 야간으로 마치고, 대신고에 입학해 1976년에 졸업했어요. 당시 형편이 아주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넉넉하진 않았죠. 그땐 그런 의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군 복무하다 사망했다는 의식, 그래서 원호자녀로서 국가의 도움을 받다 보니 모범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 국가관도 투철했죠. 또 당시가 유신이 막 시작되던 시대였으니까 사회 분위기도 그렇고. 가정형편상 대학을 갈 수 없어 부천에 있는 섬유의류업체에 취직을 했어요. 부선망독자라 군대가 면제였는데 뭐가 잘못돼 방위복무를 하게 됐어요. 결국 의가사 제대를 했는데, 당시 강원대 총장이던 이민재 씨와의 연고로 1978년 가을에 강원대 사범대에서 잡급직으로 일을 하게 됐죠. 한 2년 넘게 당시 사범대 콘테이너에서 생활하며 일을 하다가 1981년에 체육교육과에 입학을 하게 됐어요. 동료들에 비해 5년 늦은 거죠.

그는 강원대 체육교육과를 졸업하고 1985년 서울 면목고로 발령이 나면서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1986년 전국교사협의회 활동부터 1987년 6월항쟁을 거쳐 1989년 전교조가 창립되기까지의 시기는 그의 30년 교직생활의 방향을 결정짓는 시기였다. 거의 초임시절부터 교사운동에 적극 뛰어든 것인데 그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아이들이죠. 그 무렵 ‘매듭문학회’라는 문학서클과 ‘아우라’라는 영화감상반을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 활동했는데, 격동의 시대이다 보니 이놈들이 의식화가 된 거죠. 서울대 ‘페다고지’라는 모임의 대학생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6월항쟁 때는 종로에 나가면 이놈들을 만날 수 있었죠. 한 번은 이놈들과 신촌에서 만나 함께 술을 마신 적도 있어요. 그때 뱃속에 있는 제 둘째 아이 이름이 정해졌어요. 즉흥적으로 ‘새가 하늘을 날다’라는 의미로 ‘새하’가 어떠냐는 거였죠. 그 이름을 제안한 녀석이 2학년 때 학교를 발칵 뒤집어 놨어요. 4층 건물 학교에 온통 스프레이로 ‘학생회 직선제’, ‘보충수업 철폐’라고 도배를 한 거죠. 유인물도 뿌리고. 그때는 그냥 무마가 됐어요. 일이 커지면 학교장도 책임을 져야 하니까. 근데 이 녀석이 3학년에 올라가면서 이 문제가 불거졌어요. 학년부장도 압박을 하고 집에서도 압박을 하니 가출을 해버렸어요. 45일만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이들에게 쪽팔리다’고. ‘아이들이 훨씬 더 정의롭고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결국 아이들이 나를 성장시킨 거죠.

그는 교사이면서 시인이다. 그러나 시집을 내진 않았다. 1985년에 심상문학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산적가’라는 연작시다. 고등학생 시절에 ‘문학과지성’ 초창기 멤버인 신대철 선생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대학시절엔 ‘바람문학회’에서 활동했다. 사실 국문과나 국어교육과에 가고 싶었으나 실력이 안 돼서 체육교육과를 갔다고도 했다. 한 때 ‘A4’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시란 어떤 것일까? 또, 좋아하는 시인은 누구일까?

좋은 시는 신이 내려주는 최고의 선물, 한 존재로서의 한 인간이 자기에게 내려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결정적인 순간, 진실의 순간, 마치 투우사가 마지막 칼끝을 소의 목덜미에 꽂아 넣는 그런 순간의 삶의 기적 같은 것이죠. 근원적인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상투적이지만 상투적이지 않은, 죽음이나 이별, 눈물 같은 소재가 들어가면 거의 좋은 시가 나옵니다. 시인 중에서는 박용하 시인을 좋아해요. 고전적 의미에서의 최후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죠. 김주대 시인이나 류근 시인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시인은 자전거 마니아로도 알려져 있다. 2012년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5년이나 됐다. 처음엔 우습게 생각했단다. 그러나 곧 매력에 빠졌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곳곳을 누빈다. 배후령도 넘고, 원창고개도 넘고, DMZ도 따라 달리고, 목포에서 부산까지 600km 장기 라이딩도 했다. 자전거의 매력은 뭘까?

자기 힘만으로 자기를 책임질 수 있다는 것? 내 힘으로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스스로 그런 기회를 만들어낸다는 게 아닐까 싶어요. 자기결정권을 갖고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해준다고나 할까요? 4대강 탓이기도 하지만 저는 강변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반전반핵평화마라톤’을 어형종 선생과 함께 앞뒤로 보호하며 영동 노근리에서 판문점까지 1번 국도를 타고 2박3일간 300km를 달렸죠. 광주 퇴촌 나눔의집에서 일본대사관까지도 가봤고, 춘천에서 가평, 포천을 거쳐 미선·효순이 마을까지도 가봤어요. 정말 행복했어요. 앞으로의 목표는 판문점을 넘어 아버지의 고향인 황해도 옹진까지 가는 것입니다. 2년 뒤 2019년 8월이면 정년인데, 바로 갈 겁니다.

그때쯤이면 갈 수 있을까? 앞으로 2년 정도 지나면 판문점이 열릴까? 시인은 단정하듯 “그럴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스산한 냉기가 흐르는 봉의산 아래 찻집에서 흐린 날씨 탓에 더 창백해 보이는 소양강 물줄기를 내다본다. 길가에 버려진 사람들, 댐과 보에 막혀 길을 잃은 물고기들, 철조망에 걸려 아버지의 땅으로 가지 못하는 핏줄들이 그대로 가라앉아 있다.

전흥우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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