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누가 그랬던가. 강원도 사람을 암하노불(巖下老佛)이라고. 바위 밑의 늙은 부처(오래된 불상)라. 산골마을의 착하디착한 사람을 일컬어 부르는 일종의 칭찬? 최소한 욕 같아 보이지는 않는 듯 들리는 이 넉 자를 가만히 생각하면 어찌도 우리 어릴 적 청정한 모습을 그대로 닮았을까? 그런데 이는 분명 야유에 가까운 비아냥이자 멸시, 모욕이자 치욕이다.

이제부터 한 번 냉정하게 우리의 성장기 모습을 들여다보자. 무엇인가를 위해 고함 한 번 질러본 적 없고, 연극을 보며 눈물 한 번 훔쳐본 적 없고, 갈증에 목말라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부짖은 적 없었던 우리 아닌가? 목마르고 부족함을 느끼는 그 누군가가 함께 목 놓아 울어보자 하지도 않았고, 이를 함께 극복하자고 손을 이끌지도 않았다. 당연히 혼자 걸어가야 하는 줄 알았고, 아니 그 전에 그런 목마름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늙은 부처로 사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마치 강원도의 청정 식물처럼 살았던 것이 바로 우리 강원도민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아이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성장하고 있을까? 우리 아이들의 순수함을 탓하는 게 아니다. 강원도의 어른들이 죄인임을 말하고자 함이다. 그 죄목은 아이들을 나 같이 키운 죄다. 아울러 무지(無知)라는 죄목이 하나 더 추가돼야 한다. 아마 이 죄가 그 어떤 죄목보다 무게가 더 크다는 점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이쯤에서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우리의 아이들은 마임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나야 하고, 인형극을 보고 싶어 떼를 써야 하고, 강원도 축구팀을 응원하기 위해 용돈을 아껴 축구장에 가서 마음껏 힘껏 소리를 질러야 한다. 그리고 우리 강원도를 위해 우리의 목청을 돋우며 희망을 얘기하고 부당함을 호소하고 미래를 울부짖는 호랑이와 같은 건강한 아이로 키워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이 유일한 희망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 아이들에게 목마름을 가르쳐야 한다.

강원도에서는 절대로 아이를 키우지 마라. 얼마나 섬뜩한 얘기인가? 얼마나 절망적인 얘기인가? 내 아이의 손을 이끌고 가까운 공연장으로 가자. 도서관으로 가자. 그리고 축구장으로 가자. 딱딱하게 굳어가는 우리 아이들의 심장을 망치로 두들겨서라도 말랑한 심장으로 바꾸어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나 자신의 뇌(腦)라도 바늘로 찌르며 고통을 자처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 아이들의 심장 박동소리가 음악이 되고, 외침이 되고, 호탕한 웃음이 돼야 한다. 상상해보라. 우리 강원도의 아이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마치 기관차와도 같은 벅찬 심장박동 소리를 뿜어내고 있는 모습을! 젊은이의 영혼을 유혹한 죄로 독배를 들이킨 소크라테스는 못 되더라도, 우리 기성세대들은 최소한 내 아이가 영혼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도록 반성하고 가르쳐야 한다.

일본의 철학자 나카지마 요시미치의 글을 옮겨본다. “그들은(착한 사람) 자신의 무지와 무교양을 조금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지식 있는 사람, 교양 있는 사람이 자신을 배려하기만을 바란다. 그러니 언제까지나 무지하고 교양이 없는 상태로 남아 있다.” 강원도 주인이 될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이러한 모습이 아니기를….

주진 (강촌레일바이크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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