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두레생협 김선옥 이사장

겨우내 잠잠하던 하늘이 며칠 들썩이던 중이었다. 내내 참던 하늘이 눈을 뿌렸다가는 꽁꽁 얼리고 다시 따뜻한 기운으로 땅을 녹이고. 변덕스러운 2월의 시작이었다.
급히 약속을 잡고 춘천두레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으로 핸들을 꺾었다. 위치를 묻는 나에게 “아직 여기를 모르신다구요?” 수화기 넘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약간의 서운함이 묻어났다. “잘 찾아가 보겠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전화를 끊고 내비게이션을 켰다. 퇴계동으로 방향을 잡고 좁은 골목에 들어서니 얼른 눈에 들어오는 작은 간판. 몇 해 전에 다녀온 적이 있는 곳이었다.

김선옥 이사장
김선옥 이사장

“어머나 저 여기 알아요.” 미안한 마음에 호들갑을 떨며 인사를 건네니 “모른다고 하면 서운할 뻔했어요.” 대답이 돌아왔다. 환한 웃음으로 그가 매장 근처에 자리한 조합원 활동실로 안내한다. “여기 처음 와보셨죠?” “네. 활동실은 처음이에요. 아늑하고 예쁜 공간이네요.” “여기에서 참 많은 것을 하고 있어요. 교육도 하고 나눔도 하고요.”
활동실의 따뜻한 온기를 마주하니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따스하고 푸근한 느낌이 참 닮아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춘천에서 활동가로 30여년을 살아온 그와 드디어 마주 앉았다. 춘천두레생활협동조합 김선옥 이사장(52)과의 첫 만남이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네요. 내가 무슨 얘깃거리가 있다고 나를 찾으셨나요?” 수줍은 미소로 그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성인이 되면서 춘천을 떠났던 그는 서울에서 87년 민주항쟁을 만났다. 구로에서 활동하던 때이기도 했다. 항상 마음에 불씨를 품고 살던 때이기도 했다. 그러다 남편을 만나 첫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을 위해 부모님이 계신 춘천으로 돌아왔다. 아이만 낳고 다시 떠날 줄 알았던 춘천에 그는 그대로 둥지를 틀었다.

“활동가가 되겠다고 생각하고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이곳에서 아이를 낳고 자리를 잡아야 했으니까 일자리가 필요했던 거고, 둘째를 낳고 얼마 안 있어 지인의 추천으로 2000년에 ‘춘천생명의숲’ 간사로 들어가게 된 거였죠. 운이 좋았어요. 당시에 춘천생명의숲이 지금 보건소 옆 시민복지회관 건물에 있었는데, 그 건물에 많은 NGO 단체들이 함께 있었거든요. 환경이 좋았던 거죠. 그 때 많은 분들을 만나고 덕분에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춘천생명의숲에서는 3년간 간사로 활동했다. 숲을 가꾸고 환경을 걱정하는 단체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타고난 피부였다. 모든 활동을 산과 숲에서 해야 하는 일이 적성에 맞고 안 맞고를 떠나 풀이 스치기만 해도 온 몸에 알레르기가 생기는 통에 활동하는 내내 고역이었다. 나중에서야 그게 아토피인 것을 알았다. 힘들어 하던 그에게 다른 제안이 들어왔는데, 그게 바로 생협이었다.

 “역시 지인분께서 소개를 해주셨어요. 춘천생협은 엄밀히 말하면 1995년부터 조합활동을 시작했어요. 그러다 2001년에 춘천소비자생활협동조합의 매장을 열게 된 거예요. 제가 이쪽으로 옮겨온 것은 2003년이었지요. 그땐 직원이 저 하나랑 아르바이트 하시는 분 한 명, 그렇게 둘이 일했어요. 포스기도 없어서 수기로 계산을 하고 장부를 작성하면 마감하고 엑셀로 옮겨야 하루 일과가 끝나는 그런 시스템이었죠. 힘들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보람도 컸고.”

매장 인근에 사는 젊은 엄마들에게 입소문이 나면서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좋은 생활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틈만 나면 모여 함께 고민을 했다.

“지금 이사진들을 보면 그때 함께 시작했던 젊은 엄마들이 대부분이에요. 함께 아이들을 키우던 엄마들이 모여 지금 생협을 키워낸 거나 다름없지요. 처음엔 조합원 교육도 많이 하고 재능 나눔도 많이 했어요. 단순히 좋은 먹거리를 좋은 가격에 사고파는 공간은 아니었거든요. 그그러다 아토피에 대한 인식과 웰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급속히 조합원이 늘고, 그 과정에서 협동조합의 의미가 약화된 건 항상 아쉬웠죠. 어쨌든 매장을 열었고 매출이 높아야 조합도 활성화 될 수 있기 때문에 매출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는 없지만, 상품의 판매가 중요한 만큼 생활협동조합의 의미도 강조하고 싶어요.”

1인 가구가 늘어나고 평균연령이 높아지면서 국가가 돌보지 못하는 사각지대도 넓어지고 있다는 것이 김 이사장의 걱정이다. 생협의 역할이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매장의 역할에서 그치지 않고 협동조합의 의미를 실천하며 지역 돌봄의 역할을 함께 하는 것을 꿈꾸고 있다고. 혼자 살지만 혼자가 아니고, 나이가 든다고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이를테면 사회적경제네트워크나 시민연대, 여성민우회 등을 만든 활동가 1세대들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어디에서 활동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가 왔다고요. 항상 맨 앞에 있었고, 좋은 세상을 꿈꾸며 맨 앞에 서 있던 1세대 활동가들이 그 위치에서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현재 상황에 맞는 다른 방안을 모색하고 찾아나가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해요. 어떤 방향으로 어디로 가야할지 아직 답을 찾지 못해 늘 고민 중입니다.”

왜 그런 고민이 늘 마음의 불씨가 되어 그를 뜨겁게 지폈던 것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런 거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난처해하며 미소를 짓던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춘천으로 돌아와 시집살이를 했어요. 힘들 때도 있었고요. 그때 아이를 안고 여성민우회를 들락거렸는데 참 많이 위로가 됐어요. 그곳에서 젠더에 대해 공부하게 됐지요. 생협에서 활동을 하면서는 경영과 협동조합에 대한 공부를 또 하게 됐어요. 그렇게 세상은 저를 가르쳤고 공부하면서 깨달은 거라고 해야 하나. ‘좋은 세상에서 아이들이 자랐으면 좋겠다.’ ‘더 나은 세상에서 느리더라도 함께 살아가고 싶다.’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의 정국만 봐도 참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거잖아요. 공부 잘해라. 1등해야 잘 산다. 그런 시대가 아니잖아요. 최근 촛불문화로 번지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 이미 생활 민주주의가 시작됐다고 생각해요. 정치도 이제는 정치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거죠. 촛불을 통해 시민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죠. 혼자만 잘 살면 되는 세상이 아닌 함께 사는 세상을 살고 싶어서라는 이유가 가장 적당하지 않을까요.”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꿈꾸는 것도 참 마음이 아프다는 그. 상식이 통해야 한다는 말이 이미 이 사회가 비상식으로 물들고 병들어 있다고 생각한다는 그는 ‘상식적이지 않은 사람이 태어나지 않고 상식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길러지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고 말한다.

“생협의 말단 직원으로 시작해 이사장자리까지 올라오면서 정말 많은 고민을 했어요. ‘내가 과연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이것이 나의 한계는 아닐까’, ‘부족한 나 때문에 더 발전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등. 이 자리가 저에게 무거운 자리임에는 분명해요. 그렇지만 믿어주고 응원해준 조합원들과 많은 분들을 생각하며 제가 꿈꾸고 있는 멋진 세상을 생협을 통해 실천하고 싶습니다.”

협동조합의 정신으로 서로 보듬고 안아주는 춘천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그는 ‘우리 함께 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우리 조합원 활동실 참 좋죠? 우리 여기서 재미난 것 많이 함께 해보지 않을래요?” 따뜻한 그의 마음결을 따라 멀리서 봄도 출발했는지도 모르겠다.

김애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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