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지인이 대추꽃 향기를 맡아 본 적이 있냐고 물어봤다. 그리고 그 꽃향기를 한 번 맡아보면 분명히 다음해 꽃이 피길 기다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

언젠가 대추농사를 짓는 외갓집에 갔을 때 고목이 된 대추나무 뿌리로 만든 멋진 탁자와 대추나무로 만든 장식장을 보고, 거실에 있는 장식장을 달라고 떼를 쓰고 싶을 만큼 나뭇결이 곱고 부드러워서 탐을 냈던 적이 있었다. 또한 벼락 맞은 대추나무는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도장을 만들면 좋은 기운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마흔을 넘긴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대추꽃을 유심히 들여다 본 적이 없다. 그러니 향기에 대한 기억이 있을 리 만무하였다.

도대체 대추꽃은 어떤 향기를 담고 있기에 칭찬이 이렇게 과할까 싶어 대추꽃이 피길 기다렸지만 매번 꽃피는 시기를 놓쳐버리고 가을날 빨갛게 익은 대추만 보면 아쉬움이 남곤 했었다. 그런데 지난가을 은사님께서 책을 한 권 주셨는데 거기에도 대추꽃 향기에 대한 글이 실려 있었다. 이쯤 되고 보니 향기에 대한 궁금증이 눈덩이처럼 커져서 올해는 날마다 대추나무 아래를 기웃거리는 한이 있더라도 꼭 대추꽃 향기를 맡고 말리라 별렀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처지라 올해는 대추나무가 심어진 남의 집 담장이라도 기웃거리며 꽃이 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진달래가 피고 벚꽃이 화사하게 만개를 하여도 대추나무는 날카롭고 앙상한 가지만 삐죽이 바람에 흔들릴 뿐 파릇한 새싹은 고사하고 긴 겨울잠에서 깨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봄날 화려한 꽃 잔치가 끝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앙상한 가지에 파릇한 새싹이 돋아나더니 이른 더위와 장마가 시작될 즈음 눌러놓은 보리쌀만한 크기의 초록에 가까운 연노랑 꽃이 올망졸망 피어나기 시작할 때 은사님께서 ‘대추꽃 향기를 담아서 보냅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대추꽃 사진을 보내주셨다.

나는 바로 대추나무 아래로 달려갔다. 꽃이 너무나 작고 푸른 잎사귀에 묻혀 존재감조차 드러내지 못할 것 같은데 꿀벌들은 벌써 알고 잔뜩 모여들어서 꿀을 모으느라 분주했다. 나는 한참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대추나무 아래서 향기에 취해 있었다. 벌들은 그런 내 모습을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이 다리 가득 노란 꽃가루를 바르고 꿀을 모으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렇게 작은 미물조차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아는데 마흔이 넘도록 이 매력덩어리 대추꽃을 알아보지 못했다니…….

아마도 대추꽃은 꽃모양으로 눈길을 끄는 꽃이 아니라 진하고 달콤한 향기로 자신을 드러내고 비로소 조그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그런 꽃 인 것 같다. 난생 처음 맡아본 대추꽃 향기는 이른 아침 거실을 가득 채웠던 동양난의 향기에 달콤함을 더한 그런 향기와도 같았고 시원하고 달콤한 수박향이 섞여있는 것도 같아서 내가 알고 있는 단어로는 표현하기가 힘들 만큼 기분이 좋고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향기였다. 세상에 어떤 향수가 대추꽃 향기를 따라갈 수 있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게 했다.

인간의 감각이라는 것이 화려한 것에 먼저 눈길을 주게 길들여져 있어서 숨어있는 진주는 진짜 그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시골 친정집 마당 한 귀퉁이에도 대추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하지만 꽃이 피고 지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가을날 빨갛게 익은 대추를 털어서 광주리에 담아놓으신 어머니의 ‘대추 보고 먹지 않으면 늙는단다’라는 말에 무심히 한두 개 주워 먹었던 기억과 그것도 아니면 보름날 오곡밥에 들어가 있는 대추의 달콤함과 하얀 백설기에 박혀서 달콤함을 더해주었던 단맛에 대한 기억이 전부이다.

친정 엄마는 늦게 열매 맺는 대추를 보실 때마다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봐라, 나는 늦게 열매 맺어도 추석 차례상에는 내가 꼭 올라가야 차례를 지낸다’라며 더디다고 나무라는 과일들 보란 듯이 차례상에 떡하니 올라간다는 것이다. 뭐 조그만 대추알이 말을 할 리도 없지만 생각해보면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다.

어디 대추만 그렇겠는가? 우리 사는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화려하고 크고 좋은 것만 보려 하고 느림의 미학보다 속전속결 빠름을 선호하며 살아가고 있다. 대추꽃은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조그만 모습을 드러내어 화려한 모습으로 시선을 끄는 일도 없을 뿐더러 알아봐 주는 이가 없어도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그 꽃향기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맡아본 사람이라면 다시 봄날이 되었을 때 대추나무 아래를 기웃거리며 설레는 맘으로 한 계절을 보내게 만드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올 한 해 대추꽃을 보면서 나 또한 진한 향기 전하고 달콤한 열매를 나눠주는 대추나무 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찬바람 부는 늦은 가을 나는 햇대추 한 말을 샀다. 대추를 깨끗이 씻어서 푹 삶고 채에 받쳐 씨와 껍질을 걸러내고 다시 졸여서 진한 대추차를 만들었다. 휴일 날 한나절을 고스란히 투자하며 번거로운 손길이 여러 번 갔지만 하나도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진한 대추차가 만들어지는 동안 집안은 온통 달콤한 대추향으로 채워졌고, 남의 집 담장 아래를 기웃거리며 향기를 훔치지 않고도 진한 대추향을 욕심껏 집안 가득 담아둘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았다. 그리고 대추차를 만드는 동안 제일 먼저 대추꽃 향기를 선물해주신 은사님과 함께 차를 나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 나는 내년 늦은 봄날 꿀벌보다 먼저 대추나무 아래를 분주히 맴돌고 있을 내 모습과 올망졸망 빨간 방울들을 가득 달고 있을 예쁜 대추나무 한 그루를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한 가득 짓고 있다.

라상숙 (46·소양동) 가정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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