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학


매받이는 사냥을 나가기 한 달 전부터
가죽장갑을 낀 손등에 나를 앉히고
낯을 익혔다
먹이를 조금씩 줄이고
사냥의 전야
나는 주려, 눈이 사납다
그는 안다
알맞게 배가 고파야
꿩을 잡는다
배가 부르면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꿩을 잡을 수 있을 만큼의
날아 도망갈 수 없을 만큼의 힘
매받이는 안다
결국 돌아와야 하는 나의 운명과
돌아서지 못하게 하는 야성이 만나는
바로 그곳에서
꿩이 튀어오른다
 

윤성학의 매는 길들여진 매입니다. “결국 돌아와야 하는 나의 운명과/ 돌아서지 못하게 하는 야성이 만나는/ 바로 그곳에서/ 꿩이 튀어오른다”는 문장, 바로 그곳에 내가 있습니다. 올무에 걸린 내가, 옴짝달싹 못하는 내가 있습니다.

철책 1. 배부른 매는 꿩을 사냥하지 않는다.

철책 2. 굶주린 개는 몽둥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 철책 사이에 종업원을 가두는 기술이 소위 경영이라는 것이지요. 내 월급의 두께는 순전히 저 사이에서 결정됩니다. 주인의식이란 말은 고대 로마시민들이 노예를 다룰 때 처음 사용했던 말입니다. ‘주인의식을 가져라.’ 문제는 노예가 결코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 스스로 노예임을 자각할 때 노예를 벗어날 수 있는 것. 노예가 자기가 주인인 양 착각할 때 영원히 노예로 부려질 수 있다는 것을 로마시민은 일찍이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주인의식을 가져라, 함부로 떠드는 저들의 저의를 나로서는 끊임없이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 내 발목을 묶은 시치미를 이제는 떼고 싶습니다. 물론 당분간 저는 시치미를 떼지는 못할 전망, 참 우울한 전망입니다.

박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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