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일이 번거로워진 까닭은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이 많아지면 당연히 사회생활도 복잡해진다. 일마다 분화되어 절차가 생겨나고 일처리가 까다로워진다.

인장이라고 예외가 될 까닭이 없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인장의 제도가 정비되지 않아 형식이 비교적 자유롭고 분방했다. 그러나 진나라가 제도화하고, 한나라가 진나라의 인장제도를 이어받은 이후 위진남북조의 혼란기를 거쳐 수나라가 다시 통일을 하고 이를 당나라가 이어받으면서 관인(관가에서 쓰는 인장으로 지금의 직인 같은 것)의 필획이 점점 동글동글해지다가 급기야 ‘구첩전(九疊篆)’이라는 것이 나오게 됐다.

구첩전은 곧게 펴야 할 획을 철사를 구부리듯이 계속 같은 간격으로 구부려서 글자를 나타내는 방법으로 필획이 ‘아홉 번 겹친 전서’라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세어보면 적은 것은 5~6번 꺽은 것에서 많은 것은 10번이 넘어간다. 그러니 그 인장의 한자(漢字)를 읽어내는 일도 꽤나 복잡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 옥새를 비롯한 중요한 관인에는 거의 모두 이 첩전이 쓰이게 됐다.

이는 이웃 나라들의 인장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우리나라의 국새도 심한 첩전으로 글자가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충분한 식견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인장의 내용을 읽어내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다. 가뜩이나 전서는 그 형태가 다양하고 같은 형태의 한자도 변화가 심해서 인장의 글자를 읽어내는 일이 고도의 난이도를 요구하는데, 첩전의 등장은 꽤나 까칠한 어려움을 한층 더 얹은 것이다. 물론 이래야 위조도 쉽지 않고 그 신표를 유지하는 것에 유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게다가 한글 인장조차도 구부리는 획을 사용한 것들이 있어 그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과거의 인장들은 실물이 유실된 것이 많고, 현재 남아있는 것들은 대부분 인주로 종이에 찍은 인영들이다. 역사 속에서 국새를 비롯한 서책의 인증과 다양한 작품들의 감정 등에 무수히 사용된 첩전 인장은 문서의 신뢰성과 소장자의 신원, 그리고 발급 연대의 추정 등 몹시 중요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어서 당연히 읽어내야 한다. 생각보다 꽤 쉽지 않지만 말이다. 독자들도 첩전을 사용해 새긴 인장의 문자의 획을 한 번 따라가 보면 퍼즐을 맞추듯이 재미있으리라 여겨 몇 개 제시한다.
 

원용석 (한국전각학연구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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