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어머니는 손으로 직접 빚은 만두를 떡과 함께 끓여내는 만둣국 집을 운영하신다. 만둣국 외에 칼국수, 감자전 같은 곁다리 음식도 있지만 어머니 식당에서 제일 잘 나가는 메뉴는 단연 손 만둣국이다. 어머니가 만두소를 만드실 때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니까 들어가는 재료라고는 신 김장김치 다진 거랑 두부 으깬 거, 숙주나물 삶아 다진 거 등 야채 일색이며 고기는 없다. 아마도 고기가 안 들어간 담백한 맛이 매일 먹는 고기 기름에 질린 요즘 사람들의 입맛에 웰빙이라는 이름으로 딱 맞아 떨어진 것 같기도 하다.

이리 잘 팔리는 만두를 빚어내기 위해 우리 어머니 식당 ‘마루’에는 2주일에 한 번 정도 동네 아주머니 너덧 분이 모여 앉는다. 모두 칠십, 팔십 고개를 넘어가 허리는 굽고, 얼굴엔 주름이 자글자글하신 할머니들인데, 나는 시어머니 친구들이고 시집 올 때부터 자주 뵈어 익숙한 이분들을 아줌마라고 부른다.

만두 빚는 날, 이분들이 빚어낸 만두를 냉동실로 옮겨 나르고 간식도 챙겨드리며 이것저것 잔심부름을 해야 하는 나도 훌륭한 보조인력이다. 밀가루로 치대고 반죽해 밀대로 밀어 동그랗게 만든 만두피에 만두소를 채워 넣고 반달모양으로 만든 다음 양옆을 모아 끄트머리에 물 한 방울 묻혀 손가락으로 꾹 눌러 붙이면 동그란 꽃모양의 만두가 빚어진다. 만두가 한 개 한 개 만들어지는 대로 줄맞춰서 모아지고, 우리 어머니를 비롯해 동네 아주머니들이 살아온 스산한 세월 이야기가 만두와 함께 쏟아져 나오면 작은 식당은 허기진 배를 채우러 들어오는 식객들로 두런두런 채워지기 시작한다.

먼저, 달팽이 아줌마. 봄이면 강가에 나가 다슬기를 잡으면 금방 양파망 두세 자루를 채워 잡아 올리는 실력이 탁월해서 동네사람들에 의해 달팽이 아줌마라 불린다. 친정이 너무 가난해서 입 하나 덜자는 마음으로 19살에 시집을 왔는데, 알고 보니 애가 셋이나 딸린 홀아비더란다. 신랑이라는 사람 얼굴은 시집온 날 밤에 처음 봤을 뿐더러 와보니 가진 거 없고 가난하기로는 친정이나 다를 게 없었단다. 어쩔 수 없이 전실 자식 셋을 키우면서 그 와중에 내 자식도 셋을 낳아 먹여 살리느라 평생 밭고랑, 논고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생하며 살다보니 달팽이 아줌마의 허리는 90도로 굽어 있다.

지금 시대 같았으면 ‘사기결혼이네’, ‘계모 밑에서 자랐네’ 하면서 시끄러워졌을 법한 일들인데, 참 희한한 것이 그렇게 아줌마를 속이고 두 번째 결혼한 신랑이나 전실 자식들이 하나도 밉지가 않더란다. 가난하고 고생스러웠지만 내 자식 남의 자식 차별할 줄 모르는 아줌마의 착한 성정이랑 자상했던 남편의 사랑 때문에 이겨냈던 세월이랄까….

지금은 자상했던 남편도 떠나고, 아이들도 다 커서 각자 자기 가정을 꾸려서 떠나 혼자 시골집을 지키며 살고 있지만, 엄마의 사랑과 희생을 알아주는 여섯 자식이 돌아가며 용돈을 주는 바람에 돈을 써볼 새도 없이 지갑이 채워진다고 자랑하며 딸들이 사다주는 화려한 옷을 매일 바꿔 입고 다니는 바람에 그 동네에선 패션왕이 되셨다.

그 다음, 사형엄마. 사형 씨가 나하고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이라고 했으니 나로서는 사형 씨네 아주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지만 우리 어머니 못해 동네사람들이 사형엄마라고 부르니 일단 사형엄마라고 호칭해 보겠다. 이 댁은 아들들이 태어나면 이름 짓기를 일형이, 이형이, 삼형이, 사형이 순으로 태어난 순서라도 지키듯이 이름을 지었다. 다섯째로 딸이 태어났다고는 하는데 딸의 이름은 모르겠고, 일형이 엄마도 아니고 이형이 엄마도 아닌 채로 그 아줌마가 사형이 엄마로 불린 데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다.

이 댁에서 숨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놓고 공개한 이야기도 아닌 전설 같은 이야기는 지금 들으면 그 어이없음에 잠시 동안 정신이 멍해지고 말 것이다. 아들 형제들이 올망졸망 어릴 때는 몰랐는데 이 아이들이 사춘기 무렵부터 4형제 중 막내 사형이만 생김새며 걸음걸이, 행동거지 모두가 다른 형제들과 유독 다르게 크더라는 것이다. 그 또한 어이없게도 그 동네 최고의 난봉꾼, 항아리에 치맛자락만 둘러도 미친 듯이 기어들어갈 것이라고 소문난 주태백이 덕팔이 아저씨와 피부색 검은 것까지 닮아가며 크는 것이 집집마다 숟가락 개수마저 속속들이 다 알고 살아가는 시골동네에 안개처럼 소문으로 퍼지고 만 것이다. 그리고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덕팔이 아저씨와 사형이의 팔자걸음이었다. 동네 길가에서 팔자걸음으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덕팔이 아저씨를 뒤에서 잠시 지켜보던 일형이 아버지가 삽자루를 들고 덤비는 큰 싸움을 겪고 난 뒤 사형이는 사형엄마가 덕팔이 아저씨한테 당하고 낳은 덕팔이 아저씨 자손이라는 이야기가 그냥 기정사실화 되고 말았는데…. 참, 여기서도 희한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건 지금 같아선 유전자 검사니 성폭행을 당했느니 하면서 신문에 오르내릴 정도로 시끄럽겠지만 그때는 그대로 그렇게 살아갔다는 것이다. 하기야 에비 닮아가며 크는 아들의 모습만큼 정확한 유전자 검사가 어디 있으랴.

사형이가 덕팔이 아저씨네 집으로 쫓겨 간 것도 아니고 덕팔이 아저씨네가 어디 딴 곳으로 이사를 간 것도 아닌 채로 두 집 모두 그대로 그렇게 그 마을에서 살아나갔다. 순하디 순한 사형엄마가 덕팔이 아저씨랑 불륜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난봉꾼 덕팔이 놈한테 맥없이 당한 것이니만큼 그 이후 덕팔이 아저씨는 동네에서 여자들에게 요주의 인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양쪽집 사람들 모두 사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동네에서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비밀인데 비밀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 채 물이 흐르다 비가 와서 잠시 장마가 졌지만 또 그대로 물이 되어 흐르듯 그렇게 살았던 그 시절의 어른들이 만두를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두 아저씨들 모두 돌아가시고 아이들도 시내로 다 흩어져 나가 살고 있어서 시골집에는 사형이 아줌마 혼자 사는데 그 아줌마 곁을 사형 씨가 지키고 있다.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완전히 흡수되어 자라지 못했던 상처 때문인가 사형 씬 배움도 짧고 결혼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혼자 된 엄마와 함께 늙어가면서 그의 기구한 운명을 세월로 오롯이 이겨내고 있는 것이다. 그 사형엄마의 만두 빚는 솜씨는 아줌마들 중에도 매우 탁월해 번개손 사형엄마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13남매 아줌마. 말 그대로 열셋의 자녀를 두었기에 13남매 아줌마인 거다. 애들이 너무 많아 지금도 명절이면 어느 집 자식 한둘이 안 왔어도 티가 안나 모를 정도로 식구수가 어마어마하다. 예전엔 그 집 형제 중 하나가 동네 똘마니와 싸움이 붙으면 ‘우리 형 데리고 온다’ 그 한 마디에 열이 넘는 형제들이 우르르 나서는 통에 웬만하면 그 집 형제들은 건들지 말랬단다. “옛날엔 부부가 잠자리한 횟수만큼 애기들 낳았다고 보믄 되는 거여”하며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말씀하시는 아줌마. 열셋을 키우면서도 학원 한 번 보낸 적 없고 장난감 하나 변변한 거 사준 적 없었는데도 자기들끼리 어울려 놀며 잘만 크더란다.

배불리 먹이지 못하고 많이 가르치지 못한 게 애들한테 제일 미안하긴 한데 한 놈도 안 놓치고 살려내 키운 것만 생각해도 배가 부르다는 13남매 아주머니. 요즘엔 하나나 둘 가지고도 키우기 힘들다며 그것마저도 아이를 안 낳으려고 하는 세상인데 전쟁이 나도 나가 싸워야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거 아니냐는 아주머니는 왜들 아기를 안 낳는지 모르겠다며 이러면 나라의 미래가 어디에 있겠냐고 한숨 쉬듯 만두를 꾹꾹 눌러 붙인다.

그것도 참 희한한 것이 자식을 열셋이나 낳았다는 아주머니는 키도 작고 모집도 매우 가늘고 뼈에 거죽만 남아 있는 것처럼 빼빼 말랐다. 저 몸으로 아이를 그렇게 많이 낳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혈압도 없고, 당뇨도 없고, 그 흔한 신경통으로 고생한 적도 없어 오히려 살 안찌고 애기들 많이 낳으면서 몸을 열심히 쓰며 살아온 게 건강의 비결이라고 호탕하게 웃어넘긴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 말하자면 남편의 엄마다. 나는 그저 우리 어머니를 생각하면 죄송스럽고 미안하다. 나는 그리 고분한 며느리가 아니었다. 결혼하고 젊었을 때부터 어머니 말씀에 한 마디라도 토를 달고 어머니를 가르치기라도 해야 할 듯한 맘으로 떠들고 지껄이고 내 맘대로 했다. 아는 건 쥐뿔도 없으면서 살림을 알뜰하고 깔끔하게 잘하는 것도 아니면서 매사에 잘난 척하며 어머니 앞에서도 거침없이 굴었다. 그래도 한 마디 타박 없이 나를 지켜보시며 너희 들이 잘 살아주는 것이 효도라면서 하나하나 배려해주시고 변함없는 마음가짐과 성실함으로 나를 가르치셨다.

나 같이 멋대로인 며느리를 아들이랑 산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말도 못하고 지켜보시는 어머니 속은 얼마나 타들었을까를 생각하며 반성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나도 나대로 나이를 먹으면서 스스로 깨달음이 있었다는 뜻일까. 팔십이 가까운 나이에도 장사에 손을 놓지 않으시며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소소한 일자리에 만담의 장소를 제공해 주시는 사장 어머니는 아주머니들의 만두빚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어가자 “자, 우리 얼릉얼릉 끝내고 마실이나 나가볼까” 하신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만두빚기는 정리되고 아주머니들의 빠른 손놀림에 의해 소풍나들이가 준비된다. 휴대용 가스렌지와 고기 굽는 판을 챙기고 냉동실에 있던 삼겹살을 꺼낸다. 김치를 썰어 담고 통에다 밥도 담는다. 이분들의 소풍 장소는 어디도 아닌 집 가까이에 있는 오래된 소나무 아래 있는 정자라는 것을 나도 몇 번 따라가 보아 알고 있다. 나또한 소주병을 앞치마에 꽂으며 어머니와 아주머니들을 따라 나선다.

저녁 공기가 약간 차긴 하지만 이분들은 정자에 올라 자리 깔고 앉으셔서 소주반주에 고기를 구워 김치에 싸먹으며 저녁을 드실 것이다. 이분들의 이야기는 밤이 되도록 끝나지 않을 것이며 흥이 오르면 요즘 유행하는 백세시대를 흥얼거리며 하루의 노독을 풀어내실 것이다. 세월은 참 빠르다. 눈 깜빡할 새 죽을 때 다 되었노라고 아주머니 중 한 분이 말씀하시자 너도 나도 “그려, 맞아” 하신다. 참 인생은 살아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녹록치 못한 생을 살아오신 어머니와 아주머니들의 노후가 편안하기를 빌어본다. 그래서 하늘로 돌아가는 날,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할 수 있기를….

조진경 (51·퇴계동, 신나는창의력어린이집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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